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6)-농촌에서 시작된 양반의 몰락_박인로의 가사「누항사(陋巷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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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6)-농촌에서 시작된 양반의 몰락_박인로의 가사「누항사(陋巷詞)」
  • 이유진
  • 승인 2017.05.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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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공것이거나 값을 치거나 간에 (소를) 주었으면 좋겠지만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사는 사람이
목이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에 구어 내고
갓 익은 좋은 술을 취하도록 권하였는데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지 않겠는가?
내일 소를 빌려 주마 하고 굳게 약속을 하였기에
약속을 어기기가 편하지 못하니 말씀하기가 어렵구료.”
“정말로 그렇다면 어찌할 수 없지”
헌 모자를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을 신고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적은 내 모습에 개가 짖을 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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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무관이자 시인이었던 박인로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쓴 <누항사(陋巷詞)>의 일부입니다. 작자가 봄이 되어 밭을 갈기 위해 소를 빌리러 갔으나 소 주인은 이미 다른 사람과 약속해 빌려주지 못한다고 하죠. 이에 작자는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는 내용입니다. 이는 조선 초나 양난 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조선의 사대부의 표본인 양반이, 생계가 어려워 직접 농사를 지으려 하다뇨. 게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필요한 소가 없어서 다른 데서 빌리려 남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난해진 양반의 모습은 연암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환곡을 갚지 못한 양반이 자신의 양반 신분을 같은 고을의 평민 부자에게 판다는 내용을 담고 있죠. 왜 이렇게 양반이 가난해진 걸까요?

양난 이후, 조선 농촌 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신분제가 붕괴했다는 것입니다. 양반이라도 가난할 수 있었고, 평민이어도 부자가 될 수 있었죠.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이앙(移秧)법, 즉 모내기 법이 있었습니다. 모내기 법이 대체 무엇이길래 조선 사회질서를 확 바꿔버린 걸까요?

모내기 법은 모두 알고 있듯이 모판을 만든 뒤 볍씨를 촘촘하게 뿌리고 싹을 틔워 일정하게 자랄 때까지 키운 다음 물을 댄 논에 옮겨 심는 방법입니다. 모내기의 단점은 물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는 바꿔 말하면 가뭄에 몹시 취약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모내기법이 소개된 것은 고려 말이었습니다. 고려 말과 조선 전기까지는 물을 가둬두는 기술이나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내기 법을 금지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논을 경영하던 삼남지방에서 일부 행해지긴 했지만, 그 외의 지역은 노동력을 많이 요구하는 직파(直播)법, 즉 땅에 직접 씨를 뿌리는 방식을 썼습니다.

전쟁 이후 인구가 감소하고 농토가 황폐화되면서, 백성들은 농토를 재건하고 농업 생산량을 늘릴 방안을 고심하게 됩니다. 이에 줄어든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 자체적으로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모내기 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죠. 모내기 법은 가뭄에는 분명 취약한 농법이었지만, 직파법보다 벼 사이 간격을 넓게 잡기 때문에 김매기(잡초뽑기)가 쉬웠습니다. 두 사람이 매달려야 할 면적의 농지를 한 사람이 충분히 관리할 수 있었죠. 이를 통해 광작(廣作)이라 불리는 농업 경영 방식이 유행하게 되었고 넓은 농토에서 수입이 늘어나 부유해진 농민들이, 물론 자작농이지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내기 법이 좋은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모내기법을 쓰면 이모작이 가능하죠. 이모작이란 한 논에 두 작물을 심는 것으로, 주로 벼와 보리를 같이 심었습니다. 보리는 볍씨를 뿌리기 직전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었습니다. 직파를 하던 때에는 땅에 볍씨를 직접 뿌렸기 때문에 보리를 수확하기 전에는 벼를 심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내기법을 활용하면 보리를 논에서 심고,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모판에서 벼를 기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보리는 식용으로 사용하고, 벼는 상품으로 팔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부유한 농민들이 나타나게 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1)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농민도 충분히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부자가 생기면 그에 반해 가난해지는 사람도 생기게 되죠? 광작(廣作)으로 부유해진 사람이 있는 반면, 그들에게 농토를 매각한 사람들은 굶어야 할 판이 되었습니다. 다시 밭을 일구는 병작인이 된다면 다행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마을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발달하고 있던 도시로 들어가 새로운 일자리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도시는 일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죠. 이 사람들은 도시에서 장사를 하거나, 수공업 등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려가게 되었습니다. 상인과 공인이 늘어난 것이죠.

이처럼 모내기 법에서 시작한 변화는 나비효과처럼 농민 계층을 분화시켰습니다. 광작으로 성장한 농민 출신의 부자들, 즉 경영형 부농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기술을 변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장한 세력이었던 것이죠.2)

기존의 신분제는 조선의 농촌에서 먼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양반의 권위가 무너지고 부(富)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죠.

2015 국회직 9급
※ 다음과 같은 농사 기술이 널리 보급되던 시기의 생활 모습이 아닌 것은?

⦁일반적으로 모내기 법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김매기의 수고를 줄이는 것이 첫째이다. 두 땅의 힘으로 하나의 모를 서로 기르는 것이 둘째이다. 옛 흙을 떠나 새 흙으로 가서 고갱이를 씻어 내어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셋째이다.

⦁어떤 사람은 모낸 모가 큰 가뭄을 만나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 하여 모내기 법을 위험한 방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무릇 벼를 심는 논에는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하천이나 물을 댈 수 있는 저수지가 꼭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벼논이 아니다. 벼논이 아닌 곳에서 가뭄을 우려한다면 어찌 유독 모내기 법에 대해서만 그렇다고 하는가.

                                                                                        - “임원경제지” -

① 중국으로부터 “농상집요” 등의 농서가 수입되어 발달된 농업기술이 보급되었다.
② 광작(廣作)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광작은 지주도 할 수 있고, 병작인도 할 수 있었다.
③ 새로운 지대 관행으로 일정 액수를 지대로 납부하는 도조법이 확산되어 갔다.
④ 쌀의 상품화가 활발해지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증가하였다.
⑤ 병작지를 얻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도시로 옮겨가 상공업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다.

정답 ① 해설 농상집요는 고려시대 이암이 원으로부터 수입한 농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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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5 : 조선후기, 박평식, 이재윤 최성환, 가람기획
2)한국사 통론, 변태섭, 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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