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5)-붕당(朋黨)의 혼란 속에서 탄생한 유배문학_정철의 가사「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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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5)-붕당(朋黨)의 혼란 속에서 탄생한 유배문학_정철의 가사「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
  • 이유진
  • 승인 2017.05.2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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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엊그제에는 임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라 있었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 왔는냐?
내려올 때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3년일세. - 사미인곡

내 얼굴과 이 나의 태도는 임께서 사랑함직 한가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지나치게 굴었던지 반기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 지은 죄가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탓하랴. 서러워 여러 가지 일을 풀어 내여 헤아려 보니, 조물주 탓이로다. - 속미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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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은 유배가사「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의 서사 부분입니다. 임을 사모하는 여인의 입장을 취하여 유배에 처해진 자신을 임금이 언제 부를지, 그 기다림의 감정을 절절히 표현했죠. 송강이 이때 유배를 떠나게 되었던 이유는 당시 조정의 ‘붕당’ 정치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붕당’은 무엇이고 왜 생기게 된 것일까요? ‘붕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림’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림’은 소위 ‘지방 선비들의 모임’인데, 이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의 ‘대간(臺諫)’에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대간’이란 왕이나 권력이 강한 대신, 외척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때 목숨을 바쳐 상소나 간언으로 이를 저지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권력자들의 눈에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고, ‘사림들의 화(禍)’라는 4번의 ‘사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림들이 지방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고요. 그렇게 지방으로 내려간 사림들은 두 가지 활동을 했습니다. 하나는 서원 등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향약을 통해 지방민들의 민심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몸을 추스르며 사림들은 다시 조정으로 들어갈 때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사림을 핍박하던 대신들의 뒷배였던 문정왕후가 죽고,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외척 윤원형도 죽었습니다. 아직 크고 작은 대신들이 남아있었지만, 수가 많아진 사림들을 예전처럼 압박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명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하성군(후의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사림들이 대거 중앙으로 등용되었습니다. 사림을 핍박하던 대신들과 외척들은 이제 조정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죠. 역사의 흐름이 점차 사림들의 쪽으로 치우쳐, 이제 이들이 정치세력의 주류가 된 것입니다.

정치세력의 주류가 되고 집단이 커지면 으래 분화(分化)하기 마련입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가 그러했고, 대신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는 사림도 마찬가지였죠. 사림은 자신들을 핍박했던 대신 세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이들을 척결하는 것에 있어서는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선조 이전부터 조정에 진출해있던 사림들, 즉 기존 관료에 속하는 사림들은 일부 깨어있던 대신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매정하게 처신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선조 대 이후 새롭게 등용된 사림들, 즉 신진관료들은 대신 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철저했으며, 남아있던 대신세력의 무리들을 뿌리째 도려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 차이가 결국 1574년 ‘동인과 서인의 분화’를 불러오고야 말았죠.

갈등은 외척 심의겸과 신진 김효원이 이조전랑(吏曹銓郎)직을 두고 다툰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심의겸은 기존관료들이 어려움에 쳐했을 때 그들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존 관료들은 심의겸의 편에 섰죠. 신진 관료들은 김효원 편에 서서 이에 맞서게 되었습니다.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동(貞洞)에 있어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서인(西人)이라 하였고,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인 낙산(洛山) 밑의 건천동(乾川洞)에 있어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동인(東人)이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당파를 지으면 ‘붕당(朋黨)’이라 합니다. 서인들은 동인들이 현실정치를 모른다며 비판했고, 동인들은 서인들이 기존 대신, 외척 정치에 찌들어있는 기존 관료들이라며 자주 탄핵을 외쳤습니다.

송강은 1562년(명종 17)에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했습니다. 또한 그의 집안 내력을 보면 누이가 셋 있었는데, 맏누이가 선대왕인 인종(仁宗)의 숙의(淑儀)였으며, 막내 누이는 왕실 종친인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었죠. 송강은 이 덕분에 훗날 명종(明宗)과도 소꿉동무였습니다.1)강의 정치적 위치는 ‘왕실과의 친분이 있는 기존 관료’였던 것입니다. 이는 동인들의 탄핵 대상으로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동인들의 요청으로 정철은 결국 1585년 8월, 고양에 우거하였다가 창평으로 낙향하게 된다.2)

이처럼 송강의 삶은 조선 중기 정치적 흐름이었던 붕당정치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수많은 정치적 부침(浮沈)을 겪어야 했지만, 이러한 부침으로 인해 겪었던 은거 생활들은 송강에게 창작의 소재를 던져주었고, 그렇게 유배가사의 백미인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2015년 지방직 9급
※ 다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사실은?

심충겸이 장원 급제를 하자 전랑으로 천거하려고 하였다. 김효원이 “외척은 쓸 수 없다.”하며 막으니, 심의겸이 “외척이 원흉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으냐.” 하였다. 이때 김효원 편을 드는 사람들은 “효원의 말은 공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의겸이 사사로운 혐의로 좋은 선비를 배척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①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화 ②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화
③ 노론과 소론으로의 분화 ④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 논쟁

정답> ① 1575년 이후 이조전랑(吏曹銓郎)직을 놓고 동, 서인 분화
오답풀이>
② 정철 건저(建儲) 사건(1591)에서 서인처벌에 대한 입장차이로 온건(남인), 강건(북인)파로 분화
③ 갑술환국(1694)에서 서인의 남인에 대한 온건(소론), 강건(노론)파로 분화
④ 기해예송(1659), 갑인예송(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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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강가사의 수용과 맥락. 김진희, 새문사
2)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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