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eop'(138) - 지금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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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eop'(138) - 지금도 충분해
  • 차근욱
  • 승인 2017.05.2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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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아직 청춘인가 아니면 노인인가를 가르는 기준 중에 아주 간단한 것이 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돌아보는 것인데, 과거를 그리워할 때가 많다면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면서 더 바뀔 것도, 더 나아질 것도 없을 때 우리는 희망보다는 회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스콧 핏제럴드는 천재였다. 그는 소설가로서 이미 23살에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1920년대의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콧 핏제럴드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반짝 반짝 빛나는 그의 시절이 충분히 찬란한 탓이리라. 하지만 그는 여느 천재들과 같이 자신의 성공에 조급해졌는지 모른다.
 

아니면 세간의 사람들이 말하듯 그가 지독히도 사랑했던 부인, 젤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헐리웃에서 그는 어느덧 빛을 잃은 천재로 떠돌기 시작했고 화려한 생활의 이면 속 경제적 궁핍함에 고민이 끊기지 않는 신세였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그가 남긴 작품 곳곳에서 남아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 그리고 세월. 그는 자신의 명성과 재능을 조금 더 펼치지 못했다는 말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새기고 떠났다.

스콧 핏제럴드의 작품 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했던 영화로도 개봉한 바 있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리고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조금 허무맹랑한 판타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문장은 아름다웠고 충분히 매혹적이었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노인의 몸을 한 신생아라니!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어린아이가 되어 간다는 설정이 왠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냥 그야 말로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씌여진 이야기꺼리라는 감상에 그저 보고 잊었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금 영화로 이 작품을 대했을 때, 모든 문장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렇다. 이 작품은 그저 판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삶에 대해 스콧 핏제럴드는 조금은 틀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갑자기 알아버린 진실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 때 자신이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생각 없이 보내버린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는지를 뒤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소중한 것을 어린 탓에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대해 남겨진 상처는 결국 자신이 자신의 가슴에 남긴 생채기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이제야 깨달았는데, 내 몸은 늙어 가고 세월이 더 이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 회한이 찾아온다. 누구나 그 먹먹한 가슴을 어찌할지 몰라 누군가는 술잔을 찾고 누군가는 길을 떠난다.

벤자민 버튼은 그런 면에서 축복받은 사내다. 노인으로 태어나 철모르던 시절을 늙은 몸으로 보내다가 세상을 알고 인생을 알아갈 무렵, 건강한 청년의 몸으로 삶의 소중함을 기억 속에 또렷이 남길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래도록 남았다. 잊혀지지 않았다. 부러웠다. 내게도 아직 조금 더 기회가 남아있는 것일까. 벤자민 버튼처럼. 부디 그럴수만 있다면.

하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그림자가 말했다. 촛불을 등지고 흐릿하게 흔들리는 노란 불빛 앞에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젊어진다곤 해도 말이야, 몸만 젊어지고 마음이나 경험은 그대로 성숙한 채로 있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만은 없잖아. 젊다는 건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치기어린 맹랑함도 있는 건데, 나이가 들수록 둔해지고 치매가 찾아오듯이 세월이 갈수록 점점 어려진다면 노인으로서 가졌던 깊이와 성숙함도 조금씩 없어지고, 몰라서 저지르는 어리석은 바보짓도 같이 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 젊은 날을 그리워하듯이, 점점 어려진다면 성숙했던 시절에 비해 유치해지는 자신을 보며 속 깊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안타까운 채로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도 애달플 거야.’

구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잃어버린 것에 욕심만을 내면서 아쉬워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가며 나이가 들던, 세월이 가며 점점 어려지던. 결국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지금의 자신을 한탄하는 건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아버린다면, 그 때 자신은 사랑 받았었고 그 사랑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음을 몰라 그저 함부로 대해 흘러 보내버린 것임을 나중에서야 불현 듯 알게 된다면, 그건 참 슬픈 일일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보다 과거를 더 아름답게 기억할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는 지금보다 미래를 더욱 아름다울 것이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더 고민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음을, 우리가 아직은 청춘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도 무방하다면 그래, 그건 어쩌면 작은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삶이란, 뭐,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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