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4)-부모를 향한 효(孝)와 나라를 향한 충(忠)은 하나_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柿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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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4)-부모를 향한 효(孝)와 나라를 향한 충(忠)은 하나_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柿歌)’와
  • 이유진
  • 승인 2017.05.16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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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은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그로 설워 하노라.

‘조홍시가(早紅柿歌)’라 불리는 이 시조는 박인로(朴仁老)가 선조 34년에 이덕형(李德馨)을 찾아가 조홍시를 대접 받았을 때, 회귤(懷橘) 고사를 떠올려 돌아가신 어버이를 슬퍼하며 부른 시조입니다.1) 회귤 고사는 ‘육적(陸績)’이라는 소년의 효성과 관련된 고사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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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육적(陸績)이라는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원술이라는 사람이 귤을 먹으라고 주었는데 귤을 받아든 육적이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품에 간직하기에 물었더니 어머니께 드리고자 한다고 대답했다. 원술은 육적의 효심에 탄복하였다.2)

박인로는 귀한 홍시를 보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른 것이죠. 하지만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홍시를 품어다 바치고 싶어도 정작 반길 사람이 없어 서러웠던 것입니다.

박인로는 1561(명종16)에 태어나 1642(인조20)에 삶을 마친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무인이었습니다.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3대 시가(詩歌)인으로 불리고 있죠.

박인로가 자신의 글재주를 알리게 된 것은 문인(文人)으로서가 아니라 ‘무인(武人)’으로서였습니다. 본래 문인이었던 그는 학문연구를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진정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던 것이죠. 강좌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은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휘하에 종군시켰습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와중에 성윤문은 병졸들을 위로하고자 박인로에게 「태평사(太平詞)」를 짓도록 하였습니다.3(

나라가 한쪽으로 치우쳐서 해동에 버려져 있어도 기자의 끼친 풍속 고금 없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워 조선 건국 이후에 이백 년간 예의를 숭상하니 우리의 모든 문화가 한(漢)․당(唐)․송(宋)과 같이 되었더니 섬나라 오랑캐의 많은 군사가 일조에 갑자기 쳐들어 와서 수많은 우리 겨레가 칼빛 따라 놀란 혼백 들판에 쌓인 뼈는 산보다 높아 있고 큰 도읍과 큰 고을은 승냥이와 여우의 소굴이 되었거늘 처량한 임금 행차 의주로 바삐 들어가니 먼지가 아득하여 햇빛이 엷었더니 무술이 빼어나신 거룩하신 천자님이 노여움 한 번 크게 내어

평양의 모든 흉적 한칼 아래 다 베어서 바람같이 몰아내어 남해 바닷가에 던져두고 궁지에 빠진 왜구를 치지 않고 몇 해를 지냈는고. 낙동강 동쪽 강변 일대의 외로운 우리 겨레 우연히 때가 와서 제갈량을 다시 만나 오덕(五德)이 밝은 장수 밑에서 앞장서서 싸우는 군사가 되었다가 영웅과 인용들을 전하는 재상에 끼게 되었으니 남방이 편안하고 장사 군마 강하더니 왕조 하룻밤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다시 일어나니 용 같은 빼어난 장수와 구름 같은 수많은 용사들이 깃발은 하늘 덮고 만 리나 이어졌으니 요란한 군마 소리 산악 흔드는 듯 어영청 대장은 선봉을 인도하여 적진 중에 돌격하니 모진 바람 큰비 내려 벼락이 쏟아지는 듯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따위의 더벅머리도 손아귀에 있건마는 하늘에서 비가 말썽을 부려 장병들이 피곤하거늘 잠깐 동안 풀어 주어 사기를 북돋우고 적의 무리 도망하여 흩어지니 못다 잡고 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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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정자의 시조와 역사, 한수의 시조에 역사가 살아있다. 이정자, 국학자료원
2) 위의 책
3) 위의 책

적굴(敵窟)을 굽어보니 튼튼한 듯하다마는 패전하여 잿더미가 되니 요새지도 소용없네. 명나라 상제와 우리 임금의 덕화(德化)가 원근에 미쳤으니 하늘이 교활한 도적을 죽여 인과 의를 돕는도다. 외환이 없는 태평성대야말로 지금인가 여기노라. 못생긴 우리들도 신하가 되어 있었다가 임금 은혜 못 갚을까 감히 죽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 칠 년간을 쏘대다가 태평한 오늘을 보았도다.

▶ 주제: 전쟁의 승리와 태평성대에 대한 축원

본사를 보면 왜적의 침략에 많은 백성이 죽고, 임금이 피난 가기에 이르자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남방이 편안하게 되었지만 다시 정유재란(선조 30년)이 일어나고 하늘이 도와 전쟁이 끝나고 개선가(凱旋歌)를 부르면서 외환이 없는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도래하였다고 했습니다. 결사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선비로 성현의 도리를 따르고 백성들에게 충효를 가르치며 천만 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싶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박인로가 이덕형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이덕형이 사도제찰사로 영남 고을들을 순찰하던 중 영천(榮川)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영남 지역의 유림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죠. 박인로 또한 영천과 가까운 도천에 있었기 때문에 영천을 방문했고, 그렇게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박인로의 나이 41세, 이덕형의 나이도 41세였습니다. 둘은 임진왜란에 직접 참여한 경험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박인로는 임진왜란에서 성유문과 수군에 종사하였고, 이덕형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는 청원사로 갔었습니다. 이덕형이 이항복에게 “만약 내가 군을 이끌고 오지 못하면, 중국노룡령에 내 뼈를 묻고 다시는 압록강 너머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며 명에 갔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죠. 동갑내기들은 처음 만나도 금방 친해지기 마련이죠.4) 이덕형은 박인로에게 홍시를 대접받았고, 그렇게 조홍시가(早紅柿歌)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2016 법원직 9급

다음 전투가 벌어졌던 시기의 상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이(가) 진도에 도착해 보니 남아 있던 배가 10여 척에 불과하였다. 적장 마다시가 20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서해로 가려다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12척의 배에 대포를 실은 ○○○은(는)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물의 흐름을 이용해 공격에 나서자 그 많은 적도 당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 “징비록” -

① 조선 수군이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② 일본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③ 외적의 침입으로 국왕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다.
④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정답 ② 명량해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일어났다.
오답 풀이 ① 대마도 정벌 (1419) ③ 병자호란 (1636) ④ 임진왜란(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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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야기로 풀어낸 永川史 .2] ‘가사문학 대가’ 노계 박인로와 도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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