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0)-유생들, 신진사대부가 되어 직접 현실을 바꾸어 나가다._한림유생들의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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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0)-유생들, 신진사대부가 되어 직접 현실을 바꾸어 나가다._한림유생들의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 이유진
  • 승인 2017.04.1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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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고려 고종 때 한림유생들이 쓴 ‘한림별곡(翰林別曲)’은 ‘위 경기 어떠하니잇고’라는 후렴을 가진 경기체가입니다. 이 후렴의 의미는 ‘우리 모습 어떠합니까’ 정도라고 볼 수 있는데, 한림제유들의 경험, 욕망을 한 장면씩 나열하고 다른 이들에게 과시적으로 묻는 것이죠. 이 노래는 주로 사대부들의 사연(私宴)에서 자주 불렸는데, 감정이 순화되지 않고 과시적인 성향을 띠며 단순한 대상 열거라 문학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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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과 명분, 질서를 중시하는 유생들의 눈에는, 무자비하게 문신들을 몰살하고 정권을 잡은 무인들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신들을 향한 유생들의 비판적 성향은 권문세족이 지배하던 고려 말에 등장한 신진사대부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권문세족은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으로 100년간에 걸친 무신정권과 그 후의 대원관계가 진전되는 가운데 새로이 편성된 사회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왕실 혼인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높은 관직을 차지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양부인 첨의부(前 중서문하성)의 재신이나 밀직사(前 중추원)의 추신이 되어 도평의사사에서 회의로 국사를 논의하고 결정하였습니다.2)

이처럼 국사가 도평의사사에 의해 결정되자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산천을 경계로 할 만큼 광대한 농장들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농장은 면세·면역의 특권을 지닌 사적 지배력이 강한 토지였습니다.3) 농장을 넓히기 위해 자유민의 농토를 불법적으로 탈점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본래 농토의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농장주의 노비가 되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농장은 개인의 토지였고, 노비는 개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세금을 걷을 수 없었죠. 이로 인해 나라에서는 세금을 정상적으로 걷을 수 없었으며 국가 재정은 황폐해져 갔습니다. 권문세족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고려를 안에서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발하며 등장한 새로운 세력이 신진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원래 최씨 정권 때 ‘능문능리(能文能吏)’, 즉 행정적 필요에 의해 등용된 학문적 교양이 높고 행정실무에 밝은 문인들이었습니다. 문인들은 유교적 지식이 부족한 무신들을 대신하여 학문과 행정능력을 보충해주는 관료적 학자였죠. 이것이 신진사대부의 원형이었고, 한림별곡을 지은 한림유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권문세족에 비해 그 가문이 한미하였고, 지방 향리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후기를 지나면서 중소지주로 성장하였고, 그 자제들은 학문적 교양을 쌓고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한 것입니다. 신진사대부는 또한 당시 송에서 유행하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받아들였는데 당시 성리학은 사회 개혁적이고 진취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신진사대부가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 더욱 활발히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커다란 사회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은 상소 등을 통해 직접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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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감의 미학, 고려속요를 말하다.』. 염은렬, 역락
2)『한국사통사』, 변태섭, 삼영사
3)위의 책
 

신진사대부는 개혁의지를 지닌 왕들(충선, 충목, 공민 등)과 지속적으로 개혁운동을 벌였습니다. 권문세족의 강한 반발로 대부분 실패한 듯 보였으나, 개혁정책들은 점차 효과를 보았습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개정시키는 ‘전민변정’과 관련된 기구가 존폐를 거듭했으나 계속적으로 등장했습니다. 또한 공민왕 대의 성균관 중영은 개혁적인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왕의 의지의 반영이자, 신진사대부가 학문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할 수 있는 공적(公的) 영역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의 진전이 고려 내부를 점차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요. 결국 이런 변화가 큰 힘이 되어 부패한 고려를 멸망시켰을 때, 새 국가인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이들이 신진사대부입니다.
 

2013 서울시 9급
※ 다음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①삼국 시대에 출현한 장르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②고려 가요의 하나로, 유토피아적인 동경을 노래하였다.
③주로 사대부가 작가인 정형시로서, 조선 전기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④조선 초기의 산문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⑤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로서, 고려 초기부터 발달하였다.

정답③
제시된 작품은 ‘爲(위) ~ 景(경) 긔 엇더니잇고’라는 후렴구로 보아 경기체가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최초의 경기체가인 ‘한림별곡(翰林別曲)’의 한 부분이다. 경기체가는 고려 중엽 무신난 이후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흥 사대부들이 짓고 향유한 노래로, 교술적 성격을 지닌 문학이다. 고려 고종 때 발생하여 조선 선조 때까지 약 350년간 이어진 별곡체 형태의 시가가 바로 경기체가이다. 그 내용은 고려 후기 신흥 사대부들의 활기찬 감정과 의식 세계를 노래한 것이 중심이 되었다. 이처럼 신흥 사대부들은 경기체가를 통해 사물이나 경치를 나열함으로써 자신들의 호탕한 기상과 자부심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2014 경찰직 2차
※ 무신 정권에 의하여 문벌 귀족 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사대부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였다. 사대부 세력의 성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이들은 대부분 지방의 향리 자제들로,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②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인 이규보는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③ 충선왕 대에 사대부와 함께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원의 간섭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④ 공민왕이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들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정답 ②
‘이규보’는 무신 집권기 문인 학자이다. 충선왕 대 원의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한 대표적인 사대부는 ‘이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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