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9)-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조선의 왕자 이방원의 전쟁_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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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9)-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조선의 왕자 이방원의 전쟁_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
  • 이유진
  • 승인 2017.04.1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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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늦은 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 태종)은 술상을 차려놓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에게 노래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에 한역되어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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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 가는 고려에 미련을 두지 말고, 새로운 세력과 힘을 합쳐 칡넝쿨처럼 새 나라에 얽혀 살아가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몽주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답시를 읊어 이를 거절했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1392년 4월, 개경 선죽교에서 정몽주는 그의 나이 56세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이로써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정몽주가 제거된 것이죠.

정몽주와 이성계가 처음부터 반목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둘의 사이는 누구보다도 각별하였죠. 정몽주와 이성계의 인연은 일찍이 친하다고 알려진 정도전의 관계보다 20년이나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초년 관료 시절 정몽주가 이성계 부대에 배속되어 참전했던 것을 시작으로, 황산대첩 때에도 정몽주는 이성계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정몽주와 정도전과의 관계 역시 돈독하여, 선후배를 떠나(정몽주가 5년 선배입니다)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서로를 믿고 아끼는 사이였습니다. 정몽주는 스승인 이색보다 후배인 정도전에게 더 의지하며 약 30여 년 동안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성계의 회군을 지지했고 폐가입진(廢假立眞)1)을 주장한 흥국사 9공신의 한사람이었습니다. <단심가>의 주인공으로써 충신불사이군의 표상인 정몽주였지만, 사실은 명분보다 현실의 개혁 요구를 앞세우는 개혁 정치가였던 것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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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왕과 창왕 부자를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한 것. 결국 이들을 폐출하고 살해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도 우왕, 창왕은 세가(世家)에서 떨어져 열전에 편입되어 있다. 『한국사통론』, 변태섭, 삼영사
2)『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1 개국 :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박시백, 휴머니스트
 

그러나 그는 역성혁명만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고려를 위한 개혁이 반드시 하늘을 바꿔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부패한 구세력과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의 참모이자 절친한 친구인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개혁을 위해서는 새로운 세상이 열려야 하고, 왕을 바꿀 수 있다면 왕조도 바꿀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개혁 의지가 있던 고려의 신하들은 온건파(정몽주 등)와 혁명(급진/이성계, 정도전 등)파로 나뉘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정몽주의 필사적인 공격은 혁명파들에게 매서운 것이었습니다. 양자 간의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던 중, 이성계가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미 정도전을 유배 보냈던 정몽주는 이참에 이성계의 날개와도 같은 혁명파를 와해시키기로 합니다. 상소를 통해 조준, 남은, 윤소종 등을 유배 보내고, 편전 시위를 통해 유배 간 이들을 국문하도록 했습니다. 정몽주는 이때 국문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필요한 건 그들의 목숨뿐이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매를 쳐서 목숨을 끊어놓아야 한다는 말일세.”3)

일찍이 정도전이 ‘도덕의 으뜸’이라 불렀던 정몽주가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고 가장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역성혁명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그만큼 고려를 지키고자 한 그의 의지가 강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몽주의 이런 움직임에 역시 극단적 대처를 한 것이 바로 이방원(훗날의 태종)이었습니다. 비상한 상황에는 비상한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제거합니다. 비로소 역성혁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2014 사회 복지직 9급
※ 다음 주장을 한 정치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기 때문에 종사를 받들 수 없으며, 또한 천자의 명이 있으니 마땅히 가를 폐하고 진을 세울 것이다. 정창군 왕요는 신종의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울 것이다.

[보기]

ㄱ. 전제 왕권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ㄴ. 이색, 정몽주, 윤소종 등을 숙청하였다.
ㄷ. 전제 개혁을 추진하여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ㄹ. 군제를 개혁하여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였다.

① ㄱ, ㄴ ② ㄴ, ㄷ ③ ㄷ, ㄹ ④ ㄴ, ㄹ

정답 ③
오답풀이
ㄱ. 혁명(급진)파 이성계와 함께 한 정도전은 전제 왕권제(왕권중심)가 아닌 총재제(재상중심)를 지향하였다.
ㄴ. ‘윤소종’은 이성계의 혁명(급진)파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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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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