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 - 진보와 보수의 대립 그 모호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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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 - 진보와 보수의 대립 그 모호함에 대해.
  • 신희섭
  • 승인 2017.03.24 16: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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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누가 만약 요즘 한국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이야기 할 것인가? 나는 단언컨데 한국정치 이념의 무정형성을 이야기 하겠다. 현재의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더 걱정은 미래에 있다. 우리가 다음세대에 넘겨 줄 수 있는 이념과 철학이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념은 어려운 문제이니 쉽게 이야기해보자. 가장 큰 우려는 한국의 진보나 보수가 이념과 논리는 없고 세력만 있다는 것이다. 탄핵된 대통령을 십자가를 진 순교자로 생각하면서 대항세력으로 헌법재판관들이 엄청난 돈을 받았다거나 좌편향적인 사고에 빠져 있다는 순박한 소망적사고(wishful thinking)가 그렇다. 한편으로 대통령을 몰아내고 다음 진보 측 지도자가 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바람도 마찬가지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지역이라는 한국사회의 갈등구조가 ‘지역’에 더해 ‘진보-보수’라는 이념 축으로 늘어난 것이다. 정치공학적으로는 혁신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진보라는 용어로 갈아탄 진보진영은 성공한 것이다. 아주 넓은 이념의 우산아래 많은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보의 성공은 보수진영의 결속을 가져왔다.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보수진영이 경험한 권력이양에 대한 두려움은 보수를 결속시켰다. 보수도 수구를 포함하여 넓은 이념의 우산아래 많은 세력이 결집하였다.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2000년대 들어와서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 기준이 되었지만 이론적 논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특검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특검을 위협하는 이들과 군복을 입고 나와 자신은 살만큼 살았다는 식의 위협을 가하는 이들이 보수라고 자칭하면서 애국심을 들먹인다. 촛불집회에서도 이석기 문제를 들고 나온 이들이 진보라고 자칭한다.

반공주의가 보수주의와 파시즘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미래를 위한 개혁이라면서 한물간 사회주의를, 아니 실패로 이미 판명 난 북한식 사회주의를 아직까지 이론적 지향점으로 잡는 것. 보수와 진보를 혼동스럽게 하는 이런 행위들은 부족한 한국의 이념토대를 더욱 어렵게 한다.

문제는 이처럼 단순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정치의 이념적인 무정형성은 논리적인 사고를 어렵게 만들고 논리간 모순과 정책모순을 잉태한다. 한국의 보수는 시장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한다. 그렇지만 박정희시대의 권위주의와 발전주의 역시 지지하면서 여전히 강한 국가에 대한 선호가 있다. 필요하면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더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하는 분단국가의 안보환경은 안보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반공주의의 외투를 걸치고 개인과 국가간 관계와 시장과 국가간 관계의 논리적 모순을 뭉개버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책간 모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보수의 애국주의에서 ‘국가’에 대한 기준도 흔들린다. 국가가 전체 국가(state)를 말하는 것인지 정권(regime)을 말하는 것인지 그 정권을 운영하는 사람(stateman)에 대한 애정인지가 헷갈리면서 애국주의와 권력자에 대한 종교적 믿음사이를 방황한다. 그래서 태극기를 두르고 특정개인을 광적으로 지지하는 일이 논리적 모순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진보는 좀 나은가? 한국의 진보 역시 이념이 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원래 진보는 이론이 발전해야 한다. 말 그대로 '진보(progressive)'란 앞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며, 현재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인위적 개선을 위해서는 이성의 명징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버마스가 말한 성찰성(reflexivity)을 통해 기존 체제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문제제기를 하며 비판적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니 겁이 많고 체제순응적이며 모험을 피하려는 인간의 그 본성을 거부하면서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변화하게끔 하기 위해서 이론은 한없이 강력해야 하며 피를 끓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세력은 그렇게 이론이 강하지 못하다. 이론이 강하고 선명하면 지지자는 줄기 마련이다. 게다가 논리가 어려우면 더욱 지지자는 줄어든다. 지지 세력의 외연을 확장하면서 집권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명징함보다는 권력에의 의지가 중요하다. 권력정치로 세상을 보는 칼 슈미트의 ‘적과 동지의 구분’이 이념적 선명성보다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집권이지 어떻게 집권할 것인지와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지는 다음 문제이다. 현실정치세계에서 권력을 잡아야 다음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진보를 편하게 해준다. 그러다 보니 혁신과 보수사이에서 배회하는 경우도 있다.

보수와 진보내의 노력이 없는가? 많은 이론가들이 논리적 체계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구와 반동과 구분하기 위한 보수의 노력이 있다. 보수를 불편하게 만드는 친일과 권위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정리와 21세기 보수가 되기 위한 노력들도 있다. 연대(solidarity)의식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의 노력이나 자유주의를 단순히 신자유주의로만 이해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있다. 진보 역시 과거 운동권진보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노력도 있다. 1968년 이후 새로운 진보로서 여성인권, 환경과 생태계 문제와 같은 단순한 계급을 뛰어 넘으려는 서구의 노력들도 한국에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현실정치에서는 그다지 의미있게 드러나지는 못한다.

어느 순간 대선이 코앞에 와버렸다. 갑작스런 지도자 선출은 투표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더욱 단순화한다. 탄핵과정에서 흑색선전과 거짓 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상대진영의 집권에 대한 두려움은 다시 이념적 모순과 관계없이 적나라한 적과 동지의 구분만을 남긴다. 그러다보니 지금 우리가 탄핵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이 지도자의 이론과 철학의 부재라는 점은 잊혀지고 인물의 됨됨이만 남게 된다. 대선을 빨리 준비해야 하는 후보들 입장에서는 정책간 논리적 모순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이념적 지향점이 다른 수 많은 참모들이 더 많은 표를 위해 모순될 수 있는 차고 넘치는 정책제안을 할 것이다. 시간은 없고 더 많이 표를 담아야 하는 급박한 대선시계로 이번 선거에도 이념과 철학은 뒷전으로 미루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번 선출될 지도자의 가장 역사적 임무는 치유에 있다. 분열되고 실망한 시민들을 어떻게 보듬을 지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통합이 필요하다. 그런 데 그 통합이라는 것이 이념을 모호하게 하는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이념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구체적인 철학에 기초하여 어느 부분을 받아들이고 어느 부분을 역사의 단죄로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과거를 넘어서기 위한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 남북전쟁 후 미국, 명예혁명 후 영국, 대혁명 후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민주화 30년. 짧은 민주화 역사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여성대통령을 선출했고, 탄핵까지 만들어낸 우리가 이들 국가보다 못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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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도 2017-06-08 19:40:33
사회학도로서 정치관련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찾다 이 글을 봅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현실을 잘 꼬집은 이런 글에 의견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 댓글을 남깁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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