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 (129) - 세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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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 (129) - 세월의 노래
  • 차근욱
  • 승인 2017.03.2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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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요즘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다. 취향이 조금씩 바뀐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문득 무언가 떠오르려 하다가도 살풋한 이미지만 언듯 언듯 떠오를 뿐, 생각이 나지 않는 순간이 있는 탓이다.

만년필은 예전에도 좋아했지만, 요즘 들어 만년필을 사용하는 즐거움은 그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선연한 촉감이랄까, 어두운 깜냥이 조금은 눈꺼풀에서 사라진 이유 때문이랄까. 나이가 들면 고독이 느는 대신 이런 아주 사소한 즐거움이 느는 것인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지 않을까.
 

내가 요즘 쓰는 만년필은 비싸봐야 2,500원짜리이다. 대신 자유롭다. 촉이 망가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껏 잉크를 써도 좋다. 예전에 골라 쓰던 허영에 찬 그 비싸던 만년필과는 비할 데 없이 행복하다. 예리하게 긁는 느낌도 좋고 조금은 덜 번지는 듯 모아지는 잉크의 농도도 그렇다. 예전이라면 보다 좋은 것 비싼 것을 골랐겠지만, 이제는 그저 내 손에 맞는 것, 내 마음이 편한 것을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최백호 선생님의 ‘바다끝’을 처음 듣고는 숨이 멎을 뻔 했다. 좋아하던 선생님의 새 노래라라서 문득 들었을 뿐이었는데, 단지 첫 소절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어느새인가 내가 너무 멀리 온 것만 같아서.

살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라는 생각, 그저 욕심에 눈 멀어 왔다 가지 않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비 그친 하늘을 우연히 보았을 때 보이던 무지개에 문득 두 손을 모으고 싶어졌던 순간처럼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들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우연한 기회에 읽었던 최백호 선생님의 인터뷰에서 먹고 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는 대목이 떠올랐다. 살아야 한다는 처절함. 그 구질구질하면서도 서러운 현실만이 그런 깊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이제 조금은 알 것만 같은 세월이 지났다. 반짝거리는 새 것보다는 은은하게 빛나는 오래된 것이 더욱 소중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이젠 정말로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옛 노래들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전에는 그저 달콤한 사랑 노래에 귀가 간지러웠다면 이제는 삶에 대한 시어들로 조금씩 가슴이 젖기 시작했다. 단순한 사랑 놀음이 아니라 사랑에 이별을 고하는 의미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좋다 싫다, 예쁘다 밉다가 아닌, 그렇게 사랑이 있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 그런 그리움이 그리고 쓸쓸함이, 그리고 또 그런 달콤함이.

패티 김 선생님의 노래가 그랬고, 최백호 선생님의 노래가 그랬고 윤시내 선생님 노래가 그랬다. 뭐, 윤시내 선생님은 너무 시대를 앞서가신 면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저 값싼 감정만을 노래하지 않은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께서는 그 험한 세월을 이겨내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TV를 볼 때마다 놀라운 무대를 보여주는 늘 새로운 걸 그룹도 대단하지만, 예인의 그 깊은 속을 몰라주던 시절에도 다른 이의 마음에 위로를 건내 주셨던 선생님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책은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다. 음악도, 노래도 그런 것은 아닐까. 잔은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탓에 마음이 허허로워진 다음에야 선율에 가슴이 울리기 시작했다. 클라리넷 협주곡 2번에 속없이 코끝이 찡해 진다. ‘Out of Africa’가 다시금 보고 싶어졌다. 영화가 끝날 때 즈음이면, 부산에 가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망부석이 되어 그 자리에 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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