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5)-한 편 시(與隋將于仲文詩), 그리고 한 번의 큰 물살_여수(與隋)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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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5)-한 편 시(與隋將于仲文詩), 그리고 한 번의 큰 물살_여수(與隋)전쟁
  • 이유진
  • 승인 2017.03.1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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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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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보낸 이 시를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이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薩水, 현재의 청천강)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간들 여전히 빈 마을과 타버린 곡식만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로 되돌아가는 패주(敗走)였습니다. 살수의 수위는 겨우 발목을 적시는 정도였으나, 피로에 지친 수나라 군에게는 이마저도 발에 철추(鐵鎚)를 달아 놓은 듯 무거웠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레와 같이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살수의 물살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삼켰습니다.

  살수대첩(薩水大捷)! 30만의 수나라 군 중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습니다.

  요동성에서 벌어진 충돌에 이은 수나라와 고구려의 두 번째 충돌은 이렇게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조를 보면 “모두 113만 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가 (전투 병력보다) 2배가 많았다.”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나라는 왜 나라의 명운을 걸면서까지 이 전쟁을 시작한 걸까요? 또 이 전쟁으로 삼국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한반도의 삼국 간 항쟁은 점점 더 가열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것이 아주 결정적인 사건이었죠. 이 사건은 신라 입장에서는 선진 문물을 직접 받아들일 수 있는 발전의 토대가 되었지만, 고구려와 백제로서는 삼한 통일의 입지가 매우 좁아지는 일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새로운 공동의 적, 신라를 제압하기 위해 동맹관계(麗濟同盟)를 수립하였습니다. 신라에게는 새로운 우방이 필요하게 되었죠. 이러던 차에 등장한 것이 바로 중원의 수(隨)나라였습니다.
  수나라의 등장은 대륙에 다시금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는 의미였습니다. 대륙에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 항상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밝히고, 자신의 질서에 주변국이 복종하기를 요구해 왔죠. 진(秦)나라가 그러했고, 후의 한(漢)나라 또한 그러했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래 자신만의 천하를 가지고 있었고, 그 땅의 주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수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죠. 반면 신라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원치 않았고, 자신들이 삼한일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할 생각이었죠. 수나라 또한 자신만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고구려는 반드시 제압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수와 신라 간의 동맹이 결성된 것입니다.2)

  이렇게 6세기에 수(隨)와 신라의 동서 진영 대 고구려와 백제의 남북 진영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에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손을 잡았고, 백제는 이전부터 우호적이었던 왜(倭)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십자외교’가 이루어진 것이죠.
  이런 외교 교섭 후, 수나라는 신라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살수대첩을 포함, 모든 전쟁에서 수나라를 막아냈습니다. 덕분에 백제와 신라는 자신들만의 체제를 재정립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죠. 백제는 의자왕이 안정적으로 왕권을 이으며 합천의 대야성을 점령했고,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연합이 기존 성골체제를 제압하고 새로운 진골체제를 수립했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냄으로써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한편 수나라는 세 차례의 원정의 실패와 국내의 잦은 토목공사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 중 이연(당고조, 당태종 이세민의 아버지)이 돌궐세력을 이용해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당(唐)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3) 
 
  고구려 살수대첩은 당시 삼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세력이 완전히 재편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2015 서울시 7급
※ ㉠~㉣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은?

 

① ㉠ -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② ㉡ - 백제가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
③ ㉢ - 황룡사 9층탑이 건립되었다.
④ ㉣ -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

정답 ③
[오답해설]
① 425년(장수왕) 시기, ㉠이전의 사실이다.
② 백제 근초고왕 시기, ㉠이전의 사실이다.
④ 647년(선덕여왕) 시기, ㉢ 시기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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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구려, 전쟁의 나라 : 7백년의 동업과 경쟁』, 서영교, 글항아리, 2010. p.314
2)『고등학교 국사』,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인적자원부, 2008, p.54
3)『고구려, 전쟁의 나라 : 7백년의 동업과 경쟁』, 서영교, 글항아리, 2010.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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