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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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 노범석
  • 승인 2017.03.1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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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국사 노범석 교수의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못한 문제, 영화 <귀향>과 연극 <봉선화>

그간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작품은 대개 흥행 성적이 안 좋았다.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가 일간지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이에 1991년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가 개봉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를 다루었다는 점 하나 말고는 흥행과 비평 모두 참패하였다.

동명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창가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그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주인공은 아버지가 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옛날에 일본인과 동거했으리라고 짐작하고 어머니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필리핀으로 강제 징집당한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가 필리핀에서 겪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징집당해 군 위안소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며, 우여곡절 끝에 데리고 나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주인공은 이러한 가족사를 듣고 모친에 대한 증오보다 그 비참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원작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오히려 지나치게 선정성이 부각되어 논란이 많았다. 이후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봉선화>가 2014년에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이후에 <낮은 목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1990년대에 개봉하였다. 실제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비평은 좋았으나 전국 관객이 1만 명도 못될 정도로 흥행에서는 실패하였다. 일본에서도 몇몇 영화관에서 개봉했는데, 극우 단체들이 소화기를 뿌리면서 온갖 방해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이후 2016년 개봉한 영화 <귀향>이 흥행에서 처음으로 성공하였는데, 이 영화 또한 제작하는 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종전에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들이 전부 실적이 좋지 않아 투자자를 모집하기가 어려웠다는 것. 그래서 감독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하였다. 후원자 목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작품들이 흥행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처럼 일반인들과 역사교육에서도 일본군 ‘위안부’의 인식도 높지 않다.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일본군 ‘위안부’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잘못 불렸다. 정신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이며, 일제에 의해 노동인력으로 징발된 사람들을 말한다. 정신대로 징집된 여성 중 일부가 전쟁 말기에 위안부로 뽑혀나갔지만 정신대와 위안부는 엄연히 다르다. 한국사 이론 강의에서 배우는 ‘여자정신대근로령’은 엄밀히 말하면 ‘위안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 법령은 1944년에 나왔지만 일본군 ‘위안부’는 그 이전부터 계속 있어왔기 때문이다.

최근 개정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서술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1930년대 초부터 일제가 시행해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군은 그간 전투에서 성병으로 인한 병력 손실과 점령지의 사창가를 통해 군사 기밀이 누설되는 것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1931년부터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군용 공창가를 만들어 위안소를 두었다. 이들 위안부는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하거나 보급장교가 따로 모집에 나서는 방식으로 모집되었다.

1930년대 후반 전쟁이 확대되면서 수요가 늘어나자 일본은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에서는 보통 작중 시기를 1940년대 초반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중‧일 전쟁 이후 국가총동원체제가 실시되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과도 조응한다. 특히 1943년 학도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조선인도 강제 징집되어 전선에 나서게 되는데, 영화에서 등장하는 조선인 병사는 대부분 이를 통해 징발된 자들이라고 보면 된다.

일제가 전쟁 동원을 위해 식민지에서 온갖 물자를 다 가져다썼지만 조선인을 병사로 징집하는 데는 거부감을 보였다. 30년이 지나도록 식민통치가 지속되면서도 여전히 조선인들에게는 반일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병력으로 투입시키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을 테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조선인들도 강제 징집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조선인 병사에 대한 불안감과 증오‧멸시는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 <귀향>에서는 위안소에서 여동생을 만난 조선인 병사가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죽어갔고, 이를 본 여동생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1991년 정부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받았지만 실제로 신고한 분은 적었다고 한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정조’ 등의 시대에 뒤쳐진 성의식이 팽배했던 때라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동네주민으로부터 낙인찍히는 경우가 자자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영옥이 동사무소에 신고를 하러 갔다가 주저하고 나오려고 하였다. 이때 동사무소 직원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거(피해자 신고)를 누가 신고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분노해 동사무소 직원에게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

지금은 그때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문제이기에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이 필요하다. 2015년 KBS1 드라마로 방영된 내용을 재편집한 영화 <눈길>이 지난 3월 1일에 개봉되었는데, 최근의 정국과 관련하여 <귀향>만큼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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