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28) - 하늘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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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28) - 하늘 좋은 날
  • 차근욱
  • 승인 2017.03.1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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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요즘처럼 날이 맑은 날이면, ‘아, 벌써 봄이로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곤 한다. 춥고 쓸쓸하던 겨울에 비한다면야, 이렇듯 쨍한 하늘과 따스한 햇살이 얼마나 반가운지.

하늘이 맑아 화창한 날이면 빨래를 했었다. 빨래를 한다고 해 봤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세탁기가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빨래를 할 때는 나름 마음먹고 날을 잡아 하는 것에 비하면 날이 맑다고 슬슬 빨래를 해 볼 마음이 드는 자신은 기특할 정도였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빨래를 밖에서 말릴 수 있게 빨랫줄이 옥상에 걸려 있었는데, 덕분에 나는 나름 참 소소하게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도 볕이 좋은 날이면 나도 모르게 ‘아, 오늘은 빨래하기 딱 좋은 날씨네’라고 중얼거리곤 한다.
 

운이 좋아 빨래를 한 날, 날씨가 좋거나 날이 좋아 빨래를 하는 날이면 옥상에 세탁물을 들고 올라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뒤, 그 아래 앉아 하릴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었다.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빨래 아래 앉아 햇살을 맞으며 보는 하늘은 비할 데 없이 푸르고 아름다웠다. 빨랫줄 아래에 앉아 펄럭이는 빨래들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굉장한 감동이 밀려왔었는데 그 한가로움과 평화로움이, 쉽지 않은 세상살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이었던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빨래를 널어놓고 그 아래 앉아 책을 읽기도 하였는데 볕이 강했던 탓에 눈이 좀 시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바람 냄새 햇살냄새 맡으며 책 읽는 순간이 못 견디게 좋았다. 책을 읽다가 조금 눈이 아리면 그대로 뒤로 벌렁 누워 큰 대자를 한 채, 솔솔 졸기도 했었는데 지금이야 자외선이니 피부암이니 해서 다들 시끄럽지만 그 때에는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이 마냥 좋아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이었다.

햇살로 말리는 빨래인지라 빨래가 마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점심 먹기 전에 한 빨래라고 할지라도 어스름 해가 질 무렵이면 다 말랐었는데, 밖에서 볕을 받아 뽀송뽀송하게 마른 빨래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을 때의 그 개운함은 비할 곳이 없을 정도였다.

옷도 옷이지만, 사실 볕에 빨래를 말렸을 때의 하이라이트는 이불빨래였는데, 펄럭 펄럭 흩날리는 이불을 볕에 말린 뒤 잠자리에 누운 날은 왠지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고소한 햇살냄새가 좋았던 것이다.

현대인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이거 해야 하고 저거 해야 하는 중압감 속에서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 빨랫줄 아래 앉아 햇볕을 쬐며 보낼 수 있었던 순간은, 심적 부담을 모두 벗어던질 수 있는 축복이었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했고 안온했다. 이유도 없고 까닭도 없이.

언제나 볶이는 것은,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인지라 어느새 ‘목적의식’이란 것에 길들여져 버렸다. 시간에 쫓기는 탓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인가 빨래를 널어놓았으면 그것으로 끝일 뿐, 그 아래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없어졌다. 효율성으로 따진다면야 그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문득 봄 햇살을 맞으며 돌아보니 이처럼 심심한 인생도 없다.

어찌 보면 참 고약한 일인데, 해야 할 것들만 생각하고 살다보니 찰나의 행복을 돌아보지 못하게 된지도 모르겠다. 가끔 예쁜 카페거리에 가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카페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신다거나 디저트를 먹으며 휴일을 즐긴다는 글을 읽을 때면, 개인적으로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조금은 의아하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고 카페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며 느긋하게 그냥 그 공간의 즐거움을 느끼는 일은 해본 적도 없고 적응할 자신도 없다. 이유도 없이, 목적도 없이 그냥 앉아 있는다니! 생각만 해도 좀이 쑤시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목적이 없으면 적응을 하지 못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카페에서 목적 없이 앉아 있는 순간이 온다면 좌불안석이 될 뿐이다. 그저 주위를 둘러보며 느긋하게 거리를 바라보면 될 텐데.

정신없이 살다가 이렇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볕이 좋은 날이면 문득 예전의 그 빨랫줄 아래를 생각한다. 한 없이 따스했고 한 없이 평온했던 오후의 한 때.

삶의 모습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 이런 인생도 있고 저런 인생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길이 들어버린 탓에 너무나 많은 소중한 추억을 포기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이유 없이, 가끔은 느긋하게.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점점 가속도를 붙여가는 우리네 인생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너그러움이 아닌지.

날이 좋은 날, 바람이 좋은 날. 길을 한 번 나서 봐야지.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그저 혼자라고 할 지라도.

민들레 홀씨가 날리지 않을까. 벌써, 어디선가 달고나 냄새가 달큰히 나는 것만 같다.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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