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4)- 마를 캐던 청년이 세운 절이 현대인을 상상하게 만들다 _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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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4)- 마를 캐던 청년이 세운 절이 현대인을 상상하게 만들다 _서동요
  • 이유진
  • 승인 2017.03.0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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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미륵사지를 복원하기 위해 해체하던 과정에서 다량의 백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여기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639년(무왕 40) 1월 29일에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시주해서 미륵사가 건립되었다.”

이는 기존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의 왕비가 된 신라의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간청하여 세워진 것이었습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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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삼국시대를 포함한 고대사 복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뤄졌습니다. 때문에 이 새로운 기록의 발견은 국사학계에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武王)은 향가「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으로 유명합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이 노래와 얽힌 무왕과 선화 공주의 이야기를 고구려 건국 신화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서동은 과부인 어머니와 연못의 용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마를 캐어 먹고 살아 ‘薯童(마를 캐는 아이)’이라 불렸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 공주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몰래 경주로 들어가 노래(서동요)를 지어 아이들이 부르게 하였다.(이 노래가 바로 서동요인데, 선화 공주가 밤마다 남자를 만난다는 엄청난 스캔들을 담고 있었죠.) 이 노래가 대궐까지 전해지자 진평왕은 공주를 귀양 보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서동이 선화 공주를 맞아 동행하였고 결국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서동이 마를 캐던 산에 금 무더기가 있었는데 그는 이것이 보배인 줄 몰랐다. 선화 공주가 이것을 알고 금을 캐어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백제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의 의▶①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향가
         ② 민요가 4구체 향가로 정착한 노래  
         ③ 향가 중 유일한 동요(童謠)
주 제▶ ① 선화 공주의 은밀한 사랑 ② 선화 공주에 대한 연모의 정(서동의 의도에 따른 해석)
출 전▶<<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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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학교 역사 , 천재 교과서, 2012, 김덕수 외 공저
 

하필이면 서동이 마를 캐던 밭에 황금이 무더기로 있었고, 그것을 容華山(용화산)의 知命(지명)법사가 도술로 순식간에 경주로 옮겨주었다는 신이한 내용들은 서동이 백제의 왕이 될 만하였다는 정당성의 근거가 됩니다.2)

이러한 이야기와는 별개로 선화공주와 무왕이 실제 부부였는가에 대한 논란은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당시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를 보면 이러한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죠. 무왕의 재위년은 600년으로, 그 이후 무왕이 다스리던 백제와 신라는 잦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무왕은 신라의 가잠성, 모산성, 서곡성, 독산성 등지를 계속 공격했습니다. 실제 부부였다면 무왕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죠? 장인의 나라를 거의 멸망시키려 했다는 거죠.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3)

이런 상황에서 미륵사의 봉안기가 발견되자, 다시 선화공주와 무왕의 부부설이 뜨거운 쟁점이 된 것입니다.

왜 기록이 다른 것일까. 무왕은 누구와 결혼한 것일까. 그리고 누구를 사랑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더 많은 기록과 증거가 발견될 때까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역사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역사기록은 사실이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 자체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록은 역사가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그 선택은 개인의 가치관, 신념 등의 영향을 받죠. 따라서 역사 기록은 이미 만들어지는 시점부터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사실과 기록의 이러한 간격이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일지도 모릅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진실이 될지 거짓이 될지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2015년 서울시 7급 한국사

※ 백제의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무왕은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② 무령왕이 묻힌 관의 재료는 양나라에서 가져온 금송이다.
③ 칠지도에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칼임을 알려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④ 목책과 우물, 사당 등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된 풍납토성은 한성 백제시기에 축조되었다.

정답 ② 무령왕의 재료는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이다.
[오답해설]
① 백제 사비 시대의 내용이다.
③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으며, 칼의 양쪽 옆에 금으로 상감된 글에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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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기서 용화산은 후에 미륵사가 세워지는 산이다. 용화산 아래 큰 못에 미륵삼존이 나타나고, 선화공주가 여기에 절을 세우기를 간청한다. 지명법사가 다시 등장하여 못의 물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삼국유사』, 일연지음, 2002,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3)『묻고 답하는 한국사 인물까폐 1.』 , 북멘토, 2010, 글 장용준, 그림 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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