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산책 143 / 감정평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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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 산책 143 / 감정평가 보고서
  • 이용훈
  • 승인 2017.02.24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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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감정평가사

은퇴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 누구나 한 가지씩은 품고 있다. 필자에게는, 괜찮은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다. 늘 똑같은 막장 드라마를 보며 용기 얻은 면도 있다. 예상되는 인물 간 대화, 속 보이는 극 전개, 드라마나 영화가 약삭빠른 시청자를 감동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아직도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 내심 다행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국민 드라마로 칭찬받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에 빠지는 아내 그리고 동료 여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동기부여가 된다.

녹취되지 않은 말은 잠시 공간에 머물다 사라진다. 뇌리에 박힌 말이 매번 가슴을 후벼 파지만, 이 역시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줄 뿐이다. 반면, ‘글’은 모든 사람에게 노출된다. 구전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인의 탐구와 공격 대상이 되는 기록물은 어디 몸 둘 데가 없다. 탄핵정국에서 정부의 공식 문건 하나가 미친 영향력을 보면 짐작된다. 법원의 판결문도 그와 같다. 재판부의 시각, 논리, 상황이해, 이 모든 것이 판결문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고서 쓰는 것은 대부분 화이트컬러의 숙명이다. 감정평가사도 감정평가보고서를 찍어 내면서, 매 번 보고서 작성 때문에 고민한다.

다양한 목적으로 감정평가서가 발급되고 있다. 자산의 경제적 가치를 지적하는 이 보고서의 결론은 수 만 원에서 수 조원까지 이른다. 평가서의 양식은 거의 통일돼 있다. 『감정평가에 관한 규칙』 제 13조는 ‘감정평가서를 의뢰인과 이해관계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일관성 있게 작성하여야 한다.’고 못 박았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모델을 써서, 어떤 이유로 그렇게 평가했는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 핵심적인 사항은 누락하지 않고 반드시 표기해야 한다.

감정평가보고서는 컨설팅보고서와 좀 성격이 다르다. 감정평가서는 누군가에게 조언해 주는 문서가 아니다. ‘이 자산의 가치는 이 금액이다’는 명확한 선언이다. 혹자는 컨설팅 보고서 작성이 조금 편하다고 얘기하지만, 당사자는 또 달리 말한다. 컨설팅 전문가들은, 흥미를 느끼면서 웃음 띠고 이 업무에 뛰어들었다가, 나중에는 더 조심스러워지는 게 컨설팅이라고 주장한다. 숫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분석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느 공기업은 보고서를 ‘빨래’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할 만큼, 문서작업에 공들인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런 보고서는 외관도 화려하고 세련된 서식과 구성을 자랑한다. 반면 감정평가보고서는 참 투박하고 또 촌스럽기까지 한다. 간혹, 어법이 틀리거나 맞춤법에 안 맞는 단어가 등장하고, 서식도 소박한 편이다.

어떤 감정평가보고서가 좋은 보고서일까. 경제적 논리로만 보면, 용역수수료만큼의 품질을 보이면 충분하다. 우스갯소리로, 수수료가 얼마 되지 않은 보고서에 그렇게 품을 들일 필요가 있냐고 한다. 몇 십 만 원짜리 보고서에 종이 수백 장을 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 비슷하다. 수 천만 원 보고서를 잘 꾸민다고 해도 수 만 장 채우지 못하는 현실에 미안한 마음은 없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감정평가사의 충분한 의견이 들어가 있으면 그로서 돈 값은 충분히 하는 것이다.

감정평가사가 보고서의 서식과 구성은 세련되게 해도, 가급적 감정평가서에는 자세히 글을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소송감정평가 시에 두드러진다. 이 얘기 저 얘기 자세히 써 줬는데 오히려 사실조회서 두께만 늘어난 것에 위축됐기 때문이다. 굳이 먼저 알 필요가 없는 얘기까지 자진해서 기재해 줄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간혹, 위풍당당한 소송평가서를 볼 때도 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보고서에 힘이 있다. 자료를 충분히 검토했다는 인상, 또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충실히 갖추고 있는 양질의 보고서다. 이런 보고서는 회자되고 많은 평가자의 길잡이가 된다. 전례는 개선을 거듭하고 더 좋은 보고서를 출현시킨다. 인류의 역사가 그랬듯.

아직도 감정평가보고서에 오기나 오산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숫자 하나 틀리는 게 별거인가 싶어도, 숫자로 말하는 보고서가 숫자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낭패다. 잘 생각하고 말해도 실수는 나온다. 글은, 좀 더 고민하고 또 조심해서 써야 한다. 법에는 감정평가서 의무 보존 기간이 있다. 최소한 이 기간만큼은 별 탈 없는 보고서가 배출돼야 한다. 가짜 뉴스의 폐해를 지적하는 때, 감정평가사는 과연 설득력 있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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