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상태바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 노범석
  • 승인 2017.02.17 18: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법국사 노범석의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그의 ‘이름’, <영화 ‘동주’>

6호선을 타고 효창공원역에서 내려 초등학교를 지나 5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효창공원이 나온다. 정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가면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가 있다. 총 3분이 모셔져 있는데 그분들 중 한 분이 이동녕이다.

오른편으로 가면 백범 김구의 묘소와 백범 김구 기념관을 볼 수 있는데, 중간에 3명의 독립운동가를 모신 묘소가 있다. 도쿄에서 천황을 폭사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봉창 의사,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 그리고 상하이에서 주중 일본 대사를 저격하려다 실패한 백정기 의사가 이곳에 모셔져 있는데 이들 세 분을 3의사라고 한다.

그런데 3의사묘에 가보면 묘지가 없는 묘가 하나 더 있다. 이곳은 추후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면 모시기 위해 남겨놓은 가묘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전 유언에서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을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대한의 독립이 되거든 조국으로 나의 유골을 운구해 달라”고 남겼으나, 순국한 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커녕 유골의 행방도 찾지 못하고 있다. 2006년에 남북한 함께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 묘소에 모셔진 차이석도 해방‧광복 후 고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1945년 8월 중국에서 광복 소식을 들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임시정부가 미군정이랑 귀국 문제를 놓고 대립하면서 환국 일정이 유보되었는데 9월 9일 환국 직전에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직전 차이석은 광복이 되었는데 왜 귀국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느냐며 병상에서 애통해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윤동주 또한 일제가 패망하기 6개월 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사촌인 송몽규와 친하게 지냈는데, 송몽규는 윤동주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는 일찍이 임시정부와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교토 제국대학 유학시절 조선 유학생 모임에서 독립운동을 도모하려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와 송몽규 사이에 미묘한 대립 구도가 나타난다. 송몽규는 문학이 독립과 해방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윤동주는 문학을 통해 순수한 정신을 드러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송몽규는 윤동주의 생각을 존중하며, 그가 시를 계속 쓰는 것을 도와주고자 한다. 윤동주 또한 송몽규의 행동을 보고 일제 치하에서 시인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한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당시 태평양 전쟁이 터져 졸업을 3개월 앞당겨 하게 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하게 된다.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결심하면서 많이 괴로워하였는데, 이러한 고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별 헤는 밤>과 <서시>에서 잘 드러나 있다. 윤동주 시집의 서두를 장식하는 <서시>는 원래는 제목이 없는 시며, <별 헤는 밤>을 쓴 이후에 이어서 쓴 작품이다.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 내 이름자를 써 보고 / 흙으로 덮어버”렸으며,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라고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부끄러워한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며 이름자를 하나씩 찾던 화자는, 그 사이에 자신의 이름이 함께 할 수 없어 부끄러움을 느껴 언덕 위에 이름자를 묻어버린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자신의 이름자가 묻힌 언덕 위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라고 보면서 미래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러한 <별 헤는 밤>의 시상은 그대로 <서시>로 이어진다. 그는 “죽는 날까지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으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 중에는 분명 윤동주가 언덕에 묻은 이름 또한 포함될 것이다. 윤동주는 끝내 창씨개명을 하여 유학길에 오를 것을 결정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 겠다”고 다짐한다. 이처럼 <서시>는 <별 헤는 밤>과 조응해서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생생히 살아난다.

1940년대 조선과 일본에서는 소위 ‘대동아’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며 젊은이들의 전쟁 참여를 적극 권하였지만,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가 조선인 유학생 모임에서 했던 말을 들어보면 당시에 외신을 통해 외부 사정을 접해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만간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라는 기나긴 겨울이 지나 봄이 올 시기가 점차 도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윤동주는 부끄러운 “히라누마 도쥬”라는 이름이 새겨진 언덕에 자랑스레 풀이 무성해져 원래의 “동주”라는 이름으로 부활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리워한 이름들로 가득한 북간도 하늘의 무수한 별들과도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잡혀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며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묘소는 북간도에 있었는데, 해방 전후 간도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윤동주의 가족들과 친인척은 북간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간 북간도에 혼자 방치되었다. 집안이 개신교였던지라 공산화된 지역에 있을 수 없었기에 그러하였는데, 이후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되면서 동생 윤형주가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치 <별 헤는 밤>의 마지막 구절처럼.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