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왜 ‘구지가’는 삼국유사에, ‘황조가’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을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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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왜 ‘구지가’는 삼국유사에, ‘황조가’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을까?(1)
  • 이유진
  • 승인 2017.02.1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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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가야국이 형성되기 전에 구간(9명의 우두머리)이 후한 지역의 백성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지봉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하늘이 내게 명하길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너희들의 임금이 되라 하시어 여기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늘로부터 대왕을 맞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땅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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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龜何龜何 首其現也
내어 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주 제 ▶ 임금(수로왕)의 강림 기원
작 가 ▶구간(九干)-가야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김해 지역을 다스리던 9명의 우두머리

그러자 하늘에서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내려왔고 그 알에서 여섯 동자가 태어났습니다. 가장 큰 알에서 나온 아이가 수로왕이고 나머지 동자들은 오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구지가’입니다. 하늘에 소망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거북’을 불렀다는 점(700년쯤 뒤 용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구하려 부른 <해가사(海歌詞)>에서도 ‘거북’에게 빌죠), 왕(머리)을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먹겠다고 협박을 한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죠. 임금을 맞이하기 위한 집단의 소망을 담은 일종의 무가(巫歌)이자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집단 서사시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서정시는 유리왕의 ‘황조가’입니다. 유리왕의 두 아내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는 사이가 아주 나빴는데, 유리왕이 사냥을 간 틈에 치희가 떠나 버렸습니다.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이를 알고 뒤를 쫓았으나 화가 난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죠. 왕이 탄식하며 돌아오다가 짝을 지어 날아가는 황조(꾀꼬리)를 보고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 다정히 즐기는데, 翩翩黃鳥 雌雄相依
외로울사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念我之獨 誰其與歸

주 제 ▶ 짝을 잃은 슬픔(외로움)
시 대 ▶고구려 유리왕 3년(BC 17)

저는 이 노래를 볼 때마다 ‘어차피 궁에 가면 화희도 있잖아? 쳇!’ 하고 입을 삐죽거리게 됩니다.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의 이야기를 외래 세력과 토착 세력의 갈등으로 보는 설도 있고, ‘벼’와 ‘꿩’이라는 그녀들의 이름에 착안하여 수렵 민족이었던 고구려가 농경 생활로 접어드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집을 떠난 게 ‘꿩녀’, 수렵이라 보는 거죠.

<구지가>는 『삼국유사』에, ‘황조가’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습니다. 모두 고려 시절 만들어진 사서들인데 왜 따로 실려 있는 것일까요?

이자겸의 난 이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서경 세력과 신라 계승을 표방하는 기존 개경 세력의 권력 투쟁이 발생했습니다. 서경세력은 도참사상(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을 이용해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워지자 서경에서 ‘묘청의 난’을 일으켰고,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을 포함한 개경세력이 이를 제압했습니다.

유학자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서경 세력을 비판하고 유교적인 관점에서 신라 중심의 사서를 지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유교적 사서의 특징은 ‘무징불신(無徵不信)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입니다.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아니하며, 괴이한 힘, 어지러운 것, 귀신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자연히 설화와 같은 기이한 이야기들은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수로왕 강림 설화인 <구지가>도 마찬가지였죠. 다만, <황조가>와 같이 인간의 감정을 담은 서정시와 믿을 수 있는 실제 사건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삼국사기』보다 나중에 쓰인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편찬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신이한 일들을 통해 중생들에게 부처의 위대함이나 생활에 필요한 교훈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한 두 사서가 편찬될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도 매우 달랐죠. 김부식이 살던 때는 금나라의 요구로 군신의 맹약을 맺기는 했지만, 덕분에 전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에는 무신들이 강경한 외교정책을 고수하며 몽고제국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전장에서 싸우며 피를 흘리는 것은 백성들이었고, 무신 정권은 강화도로 숨었죠. 결국 고려 조정은 몽고가 세운 원나라에 항복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민족적 자존감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이후 계속되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자주국의 위상도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우외환을 이겨낼 강한 민족적 자존감이었습니다. 일연은 이를 위해 고조선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차근차근 풀어내었습니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에서 전할 수 없었던 많은 설화와 민담들이 『삼국유사』의 奇異(기이)편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칫 단절될 뻔한 고조선에 관한 설화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요.

문학사적으로 고대 가요로 함께 분류되는 <구지가>와 <황조가>는, 신이한 강림설화와 서정시라는 이유로 각각 사료 작자의 선택에 의해 따로 전해지는 사료가 되었습니다.

16년 국가직 한국사 1번> ㈎와 ㈏에 들어갈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   가   )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고려 인종 때 편찬되었다.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등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   나   ) 은(는) 충렬왕 때 한 승려가 일정한 역서 서술 체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저술 한 역사서이다. 총 5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민간 설화와 불교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① (가) - 고조선의 역사를 중시하였다. ② (가) -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였다.
③ (나) -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양하였다. ④ (나) - 도덕적 합리주의를 표방하였다.

정답 ③ (가) - 삼국사기 (나) - 삼국유사 / 삼국유사는 민족적 자주의식을 강조하였다.
[오답해설]
① 신라 우위의 역사 서술을 지향하였다.
② 신라 계승 의식을 강조하였다.
④ 삼국사기에 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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