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14) - ‘성인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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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14) - ‘성인용’에 대하여
  • 차근욱
  • 승인 2016.11.2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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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아... 아... 오늘의 이야기는 절대 야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좀 따분한 이야기랄까요? 무언가를 기대하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

1994년, ‘한국 최초의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타이틀로 극장에서 상영했던 영화로 ‘블루시걸’이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애니메이션이었기에 성우가 당연히 있었는데, 당시에도 헐리우드 트랜드를 따랐는지, ‘최민수’, ‘엄정화’, ‘김혜수’, ‘노영국’, ‘조형기’님 등의 호화 목소리 캐스팅으로 성인영화로서의 기대를 더욱 고조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신 분들도 계신 것처럼, 영화는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투자된 돈은 당시 돈으로 15억이었음에 반해, 관객은 20만 정도에 그쳤던 탓이었다. 흥행에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관련 산업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시라면 모두 한 마디씩 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의 생각은 이렇다. 애초에 ‘성인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탓이었다고.

예전부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인데, 이상하게도 ‘성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많은 사람들이 ‘야한’이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왜 ‘성인’이라는 의미가 야하다는 의미여야 할까. 나는 이런 세간의 인식이야말로 ‘성인용’이라는 단어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싶었다.

‘블루시걸’이 상영된 1994년, 애니메이션은 그저 ‘만화영화’로만 인식되어 ‘아이들이 보는 유치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블루시걸’의 화재성은 큰 의미를 가졌다. ‘만화영화’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어른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만화영화’란 어떤 것일까라는 관심사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얼마나 ‘「야한」 만화영화일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져 많은 이들의 관심을 유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블루시걸’은 당연히 ‘야 해야’ 했고, 인체와 자연을 심하게 거스른 억지스런 그림과 설정으로 보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채, 관심은 결국 ‘역시 만화영화는 어쩔 수 없이 만화영화네.’라는 씁쓸함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해 한해 가면서 보고 싶은 영화라던가, 관심이 가는 주제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화려한 영화나 신기한 영화에 구미가 당겼다. 특히 SF라면 더욱 사죽을 못썼달까.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그야 말로 ‘성인’영화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성인용’이란 ‘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야한 것’과는 거리가 먼 영화다. 내가 생각하는 ‘성인’영화로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던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혹은 ‘밀양’과 같은 진솔한 영화이다. 물론, ‘색계’와 같이 야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성인용’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영화나 만화나 소설은, ‘야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사는 것일까.’, ‘인생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와 같은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에 대한 영화나 만화가 바로 ‘성인용’이 아닐까.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중학생 남자아이라면 ‘야한 것’이 최대의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을테니, ‘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정도에 그친 영화나 만화라면, 당연히 ‘성인’들의 최대 관심사를 바탕으로 한 공감대를 담고 있다고 하기에 적절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블루시걸’을 보았을 때 - 힘들게 만드신 분들께는 제법 송구스럽지만 - ‘성인용’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작품성에 적잖이 실망했었다.

물론, 상업영화이다보니 ‘대중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성인’이라는 수식어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아주 조금이었다 할지라도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야하고 흥미위주의 내용뿐 이라면, 그것은 ‘성인’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한참 호기심 많은 중학생 친구들이나 고등학생 친구들의 쌈지 돈을 노리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성인용’이란 ‘문학’이 아닐까. 조정래 선생님이나 박경리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 혹은 톨스토이 선생님의 글이야 말로 진정한 ‘성인용’이다. 존재의 고뇌와 의문, 회색지대에 살고 있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야말로, 꼬맹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관심도 가질 수 없는 ‘공감’이므로.

그래서 나는, ‘블루시걸’이 적어도 무조건 ‘야할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나름의 ‘멋’이 있기를 바랬었다. ‘문학’까지는 아니어도 ‘개똥철학’정도는 담고 있어야 ‘성인용’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자격이 있을테니. 아니면 ‘미야자키’ 감독님처럼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동심의 카타르시스라도 전해줄 수 있었다면, ‘성인용’이자 ‘아동용’으로서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시대를 살면서 가장 슬픈 것은, 존경할만한 어른이 이제는 안 계신다는 현실이다. 그리고 점점 ‘성인용’도, ‘성인’도 찾아보기 힘들어 진다는 사실이다. 속이 보이는 계산, 말초적 자극이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무엇을 의지해 살아야 하고, 누구에게 삶을 물어야 할지 가끔은 막막할 때가 있다. 적어도 존경할 어른이 한 분 정도라도 계셨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성인용’을 통해 가끔은 삶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법임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세상. 자신의 역량과 동떨어진 허명(虛名)이나 자리만을 욕심내어, 세상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이 시대의 어른들을 보면서 우리가 과연 얼마나 제대로 된 ‘성인용’을 통해 ‘성인’이 되어 왔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소리지르고 악쓰고 울고 불고 하는 연기는 초등학교의 배우 지망생도 한다. 결코 울고불고 잘한다고 해서 명연기가 아니다. 말 없는 눈빛 속에서, 잔잔한 미소 속에서, 혹은 담담한 한 마디를 통해 울림을 전하는 연기자야 말로 진정한 성인 연기자가 아니던가. ‘진짜’가 멸종된 우리나라에서 언제쯤 진정한 ‘성인용’을 만나볼 수 있을지, 11월의 마지막을 마주하며 뉴스를 살피다 아주 조금, 나는 그만 씁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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