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11) - 겨울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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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11) - 겨울의 문턱에서
  • 차근욱
  • 승인 2016.11.0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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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날이 어느덧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나도 달리고 있었다. 조금은 쌀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벼운 옷이었지만 그래도 달리다보면 땀이 나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겨울을 알리듯 알싸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달리고 싶어진다. 코가 빨개지고, 손끝이 시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기에 더욱 달리고 싶어진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 들이 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하면서 리듬을 탄다.

겨울은 설레이는 계절이다. 약간의 흥분, 그리고 약간의 쓸쓸함.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크리스마스의 축제분위기와 연말연시의 흥청거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겨울에는 창 밖 저 곳 어디메에 엽서처럼 예쁜 전등의 총천연색이 명멸하는 풍경이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한참을 달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디선가 강아지가 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층집 계단 모퉁이에 강아지가 나를 보며 연신 짖고 있었다. 그 뒤로 하늘은 파랗기만 하다. 땀을 닦으며 문득 서 있자니 무언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어린시절, 신나게 뛰어 놀다가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이라도 왠지 친구들과 다시 공이라도 차러 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겨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많은 기억들이 갑작스럽게 떠오른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까지. 아, 그 때 정말 그랬었지. 왠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워 늘 가던 헤어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적당한 친근감과 적당한 거리감으로 반갑게 맞아주는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는다.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짧게 해주세요’라거나 ‘밑에만 다듬어 주세요’정도로도 충분히 뜻은 전달된다. 그리고는 반쯤은 졸면서 반쯤은 농담하면서 머리모양이 다 다듬어 질 때까지 기다린다. 자주 가는 헤어샵이 있다는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다. 일단은 믿을 수 있고, 그리도 반갑다. 사람의 거리란 참 미묘해서 너무 가까우면 불편하지만 너무 멀면 외롭다. 그래서 사람간에 있어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쓸쓸해지지는 않게. 살다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목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달갑지 않은 훈계를 듣게 되는 때도 있는데, 그런 경우의 훈계는 도움이 되기 보다는 그저 거리만을 멀어지게 한다. 그래서 사람의 관계란 어렵다.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가까움. 어쩌면 현대인은 모두가 그런 관계를 원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모두가 외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주 가는 단골 헤어샵의 사장님은 웃는 인상이 좋은, 서글서글한 총각 아저씨이시다. 총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법 연륜이 있으셔서 세상 사는 이야기도 적당히 나눌 수 있고 이런 저런 고민도 과하지 않게 상담해주시곤 한다. 물론, 헤어디자인 실력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이고. 헤어샵에는 뭔가 일정한 간격을 정해서 가기 보다는, 그저 조금 모양새가 삐뚤빼뚤하다고 느낄 때면 가곤 한다. 물론,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 드문 편이라 벼르고 별러서 가야 겨우 한번 머리를 다듬을 수 있기는 하지만.

머리를 다듬고 나서는 시장을 돌아본다. 과일가게도 구경하고 길거리 음식점도 구경하고. 각자의 일상 속에 충실한 사람들을 보면서 모두의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보곤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물 겹도록 가슴 저린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왠지 무안해서 우유를 샀다. 언제든 마시겠지. 우유는 없으면 안되는거니까. 뭔가 하루를 뿌듯하게 보낸 기분이 들어서 콧노래를 부른다. 문득 군밤이 먹고 싶어진다. 군고구마도 그립다. 아, 겨울이 오는구나. 나는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파란 하늘은 어느새 조금씩 어둑해져간다. 터덜 터덜 집으로 걸어가며 나는 지나버린, 이제는 멀어져버린 기억들을 만진다. 이 맘 때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옛일들. 아프지만 달콤한 기억들. 언제까지나 잡고 싶은 추억들.

바람이 선뜩해서 뒷 머리를 만지니 까슬까슬한 촉감이 제법 좋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한 해가 가고 다시 새해가 오겠지. 아, 이제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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