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10)-그래서 다시,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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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10)-그래서 다시, 아날로그
  • 차근욱
  • 승인 2016.11.0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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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좀 이상한 일인데, 종이로 보는 텍스트와 디지털 화면으로 보는 텍스트의 양자 간에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아, 이상한 일이라고 하면 안 되려나? 하긴, 뭐 어쩌면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해서는 원래 뇌가 그렇게 인식하는 차이가 있으니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작고 강한 정부를 위해 전자정부를 구축하고자 하는 최근 각국의 노력들과는 별개로, 나는 나름의 전자도서관 시스템을 구축하려 한 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매우 개인적으로. 내가 가진 모든 책을 전자책으로 만들어서 목록을 관리하기도 편하게 하고 필요한 책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해야 겠다는 취지의 매우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나는 예산을 확보하는 한편, 관세까지 물면서 일본 아마존을 통해 북 스캐너를 주문했고, 대형 도서용 절단기, 와콤기술이 적용된 12인치 태블릿 컴퓨터를 구비했다. 예산이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뭐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서. 뭐 그리하여 어찌 어찌 종이 책을 전자책으로 만들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기는 했는데, 전자책을 만들어 태블릿으로 보다보니, 그것이 생각보다 그리 효율성이 높지는 않았다.

물론, 태블릿 컴퓨터 화면을 통해 본문에 얼마든지 낙서할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문제는 가독성이었다. 이 점이 개인적으로 묘하다고 느꼈던 대목인데, 디지털 화면을 통해 보는 텍스트는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보다 더 집중이 된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였지만, 한 눈에 들어오는 인식적 측면은 종이활자보다 덜했다. 그런데 정보를 파악하고 정리한다는 측면에서 언제 그 많은 책과 정보를 모두 꼼꼼하게 읽고 앉아 있겠는가. 일단 개괄적으로 보면서 정보의 중요도에 따라 강약을 조절해야 하는데, 디지털 텍스트는 그 점에 있어서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종이로 출력한 내용이라면 한 번에 휙휙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화면 속의 본문 내용은 아무래도 세세한 부분에 시선이 머물고 마는 것이었다. 결국 전자책 도서관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다시 종이책과 출력된 인쇄물을 보며 글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게 되었다.

디지털은 정확하다. 데이터의 소실도 없고 관리마저 간편하다. 하지만 질감이 없다. 조금은 무색무취한 무미건조함. 처음에는 흥미로워 빠져들지만, 결국 온기 없는 모습에 웃음을 잃게 된다. 디지털은 정보 그 자체이지만, 이야기가 없다. 차갑다. 그래서인지, 내게까지는 와 닿지 않는다.

최근의 일상들을 돌아보면 사람 관계도 점점 디지털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언젠가의 뉴스에서 요즘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람 만나기를 부담스러워 하게 된 탓에, SNS계정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이제 친구는 네트워크 속에 존재하기에 ‘좋아요’를 누르며 친구를 만들어 가는 시대라는 기사를 보고 조금은 씁쓸했다. SNS 네트워크 속 화려한 배경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은 있을 지라도 결국 정말 외로울 때 전화할 수 있는 질감이란 존재하지 않을 테니.

결국 나는 다시 종이로 돌아갔다. 다시 종이로 된 자료를 들고 다니며 밑줄을 긋고 읽고 접어 둔다. 종이는 정직한 종이의 질감으로 한 눈에 들어오고 만져진다. 가끔은 그 무게감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피식 웃는다. 언제부터 책의 무게와 두께가 그리 불편했다고. 이제 와서 그런 불평인가, 싶어서.

그리운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퀴퀴한 시장 골목 선술집에서 시시한 안주에 탁주 한 사발을 나누어 마시더라도, 그러니까 그리운 사람이기에 환히 웃는다. 이런 저런 주판알만 튕기며 웃는 얼굴로 을러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 웃는다. SNS는 할 줄 모르더라도 전화만으로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이가 있기에 밤은 누룩처럼 익어간다.

내게 디지털은 너무나 화려하다. 그저 화려할 뿐이다. 아마도 디지털의 화려함이라야 마음이 푸근해 지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구식인지라, 색 바랜 종이의 질감에 안도를 하고 만다. 아날로그의 촌스러움을 마주하고 나서야 긴장을 놓는다.

세상은 세월을 따라 변한다. 많은 것이 바뀌어 가고 우리는 새로운 것에 정신이 팔려 정작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어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란 얄궂어서 돌고 돌다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기 마련이다. 잃고 나서야 소중한 것인 줄 알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겁이 많아진다. 혹시 지금의 선택으로 내가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하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 번쯤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인간인 것을. 수업료를 치르고 난 후에야, 겨우 지난 그 시절이 아름다웠음을 깨닫는 것 또한 성장인 것을.

사람들이 똑똑해지고 세상이 더욱 빨라질수록 온기가 그립다. 이렇게 화려한 세상에 디지털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 그렇지만 디지털만으로는 온 세상을 다 채울 수 없다. 가끔은 늦더라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지나도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아날로그의 자리는 아직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도,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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