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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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 노범석
  • 승인 2016.10.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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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국사 노범석 교수의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러‧일 전쟁에 대한 소련의 설욕전, 1939년 할힌골 전투 – 영화 <마이 웨이>

식민 통치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앙숙이 된 두 친구가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를 넘나들면서 화해를 하게 되는 영화 <마이 웨이>는 일본인 주인공인 하세가와 타츠오(배우 오다기리 조)의 모습을 인상 깊게 다루고 있다.

그는 조선 총독인 할아버지가 파티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세력의 테러로 사망하자 조선인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품게 된다. 마라톤 라이벌로서 같이 성장해갔던 친구 김준식(배우 장동건)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세월이 흘러 마라톤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김준식을 만나게 된 그는 선발전 막바지에서 1위의 자리를 빼앗긴다. 그러나 일본측 코치의 부정행위로 준식이 반칙으로 인한 실격패를 당하게 되자 보다 못한 조선인 관중들이 난입하면서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폭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전부 일본군에 강제 징집 판결을 받게 되어 머나먼 만주 벌판으로 떠나게 된다.

일련의 과정에서 허망함을 느끼게 된 타츠오는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군에 자원입대하면서 뼛속까지 군국주의자가 되어 전장에서 준식과 재회하게 된다.

 

타츠오와 준식이 맞게 된 전투의 상대는 소련군이었다. 당시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던 이전 장교를 대신하여 일본군을 지휘하게 된 타츠오는 자살특공대로 소련군의 기갑부대를 섬멸하려고 하는 무모한 작전을 단행한다. 그러나 작전을 실행하기에 앞서 소련군의 기습을 받은 타츠오의 부대는 급히 준비한 자살특공대 부대로 소련군의 탱크를 저지해보려 시도하지만, 소련군의 화력에 압도당한 상태에서 패배한다. 얼핏 태평양 전쟁의 모습을 보는듯한 이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전투였던 1939년 할힌골 전투를 모티브로 삼았다.

1937년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국민당의 지리멸렬한 국민혁명군이나 군벌들의 구식 군대를 상대로 승승장구를 올리다가 몽골 초원에서 소련군과 첫 전면전을 맞게 된다. 일본은 이미 이전에 제정 러시아의 군대와 싸워 이겼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였고, 무리하게 소련과의 전투를 시도하다가 전차 부대의 압도적 화력 앞에 충격적인 패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전투에서 드러난 일본군의 문제점을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철저하게 이 전투를 잊는 데 급급하였다. 2년 후 태평양 일대에서 벌어진 미군과의 전투에서도 일본은 할힌골 전투에서 경험하였던 것과 같은 문제점에 직면하게 된다.

1905년 러‧일전쟁,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과 끝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잘못된 상황판단은 사실 일본이 근대 국가로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데뷔전인 러‧일 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인과 난쟁이의 전쟁’이라 불리었던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의 일면을 살펴보면 일본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보기는 힘든 전쟁이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전투는 쓰시마 해전이었지만, 러‧일 전쟁의 전반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대륙에서 일어난 육지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의 주력 부대가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로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유럽에 있는 주력 부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 없이 철수하면서 일본군의 전력을 깎아먹었고, 요동의 전략적 요충지인 뤼순을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더 이상 러시아를 몰아낼 만큼의 여력이 없던 상황이었다.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싶었던 러시아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러시아의 근대화 정책으로 저임금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황제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무리를 지어 궁전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맞이한 건 황제의 군대였다. 무차별한 총격 앞에서 1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차르는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황제 숭배 신앙이 뿌리 깊게 박혀 있던 러시아 민중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피의 화요일’ 사건은 바로 러‧일 전쟁 중에 있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대외적으로는 러‧일 전쟁의 패배를, 대내적으로는 제정 러시아의 붕괴를 불러왔다.

러시아의 내부 사정으로 종결된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전쟁의 결과에만 관심을 보였다.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는 일본 특유의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해낸 일본은 30년 후에 일으킨 전쟁에서도 러‧일 전쟁의 신화가 지속되기를 기대하였다. 이미 국가 체제를 정비한 소련은 할힌골 전투에서 전쟁은 국력으로 싸우는 것이라는 현대전의 진리를 일본에게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이를 깨닫지 못한 일본은 3년 뒤 바다 건너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국주의의 종말을 앞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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