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돈 앞에 장사 없다지만, 그래도 연꽃은 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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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돈 앞에 장사 없다지만, 그래도 연꽃은 피겠지
  • 오시영
  • 승인 2016.09.0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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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돈 앞에 장사 없다!” 2016년 9월,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2016년 대한민국은 자본주의의 최악의 추한 모습을 민낯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은 썩을 수 있다. 국회의원도 썩을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판사는 썩으면 안 된다. 검사는 썩으면 안 된다. 썩은 내를 풍겨서도 안 내고, 자신이 스스로 썩어도 안 된다. 그런데 판사와 검사가 썩어지지 못해 안달이다. 성경은 한 알의 밀알을 두고, 썩어지지 않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검사와 판사가 썩고 썩어 악취를 진동하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겠다고 야단이다. 나중에 국회의원에도 나가야 하고, 장관도 되어야 하고. 시중에서는 이를 두고 “지랄도 풍년이다”라는 악담을 늘어놓는이들조차 생겨나고 있다.

이 가을, 연꽃을 생각한다. 진흙 속에서 자라는 연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결하고 고귀하다. 더러운 연못에서 깨끗한 꽃을 피우고, 불교에서는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어나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여 청정함을 상징하는 꽃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연꽃을 만다라화, 수단화라고도 한다. 뇌지(雷芝)라는 연꽃의 다른 이름 앞에 서면 망연자실해질 정도로 충격적이다. 번개가 내리 꽂히는 듯한 향내에 선비가 정신을 잃을 정도라고 하여 극찬하는 까닭이다. 연꽃 뿌리줄기는 땅 속 옆으로 길게 뻗는다. 가을이 되면 줄기 끝부분이 굵어지며 줄기 안에 수많은 통로를 만들어 구멍을 송송 낸다. 연근은 이런 속성으로 순환계와 이비인후과 질환, 호흡기 계통의 치료제로 쓰이기도 한다.

어이하여 사법부, 판사와 검사들이 연이어 억대가 넘는 뇌물을 상시적으로 받으며 부정부패의 최선봉에 서고 있는 것일까? 이를 한 두 사람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기에는 만연히 펴진 세태가 심히 염려스럽다. 판ㆍ검사에게는 정(淨)함이 있어야 하고, 정(精)함이 있어야 하며, 정(鼎)함이 있어야 한다. 고요함과 맑음과 균형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正)함이 있어야 한다.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목사나 신부, 스님은 신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신의 길로 인간을 인도할 뿐, 그들이 스스로 신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판ㆍ검사는 잘못한 자들에게 그들이 지옥이나 연옥에서 경험하게 될 형벌의 고통을 직접 가하는 심판자이기 때문에 신의 대행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미쳐 날뛰면, 돈에 휘둘려 형벌에 처해질 자를 무작정 용서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면 이는 신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어, 세상이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마는 까닭에,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돈에 미쳐 날뛰는 판사와 검사는 이미 판사와 검사가 아니다. 깡패보다, 양아치보다 못한 자들일 뿐이다. 판사는 연꽃 같아야 한다. 범죄라는 더러운 땅에서 뇌지, 최고의 향기를 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함을 통해 세상이 밝아져야 하고, 그들의 정함을 통해 세상이 깨끗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썩어 악취를 풍기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검찰과 법원 조직이 맑은 향을 풍기고, 스스로 맑고 깨끗하다면 악취를 풍기는 쥐새끼 같은 한 두 사람이 그 안에서 견디어 내지 못한다. 정함과 탁함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탁함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분위기가 탁해 그 안에서 탁함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형준 부장검사가 스폰서 검사로 밝혀지고 있다. 고교 동창이라는 한 친구가 그 동안 김형준 부장검사와 맺어온 문자 주고받기, 전화 대화 내용들을 저장하고 녹취하여 세상에 공개하였다. 결론은 혼자 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 타락의 한 현상을 본다. 김형준 부장검사의 말에 의하면 한 번 코를 꿰고 계속되는 친구의 겁박에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건 김 부장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낀 것일 것이다. 사업을 하였다는 그 친구라는 이, 수억 원의 돈을 투자하여 스폰을 하였기에 어느 정도 본전을 찾을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였을 터, 그러기에 자기의 스폰, 투자를 무시해 버린 무력한(?) 친구 검사에게 물귀신 작전을 쓴 것은 역지사지해 보면 이해가 간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친구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인도 아닌 자들의 검은 뒷거래는 그냥 악취가 날 뿐이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필자는 이런 현상을 “자본주의의 필연”이라고 본다. 자본주의는 괴물이다. 스스로 제 꼬리를 잘라 먹는 악마 중의 악마이다.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는 자본은 필망일 수밖에 없다. 돈이 돈을 잡아먹기 시작하면 잡아먹히지 않을 돈이 없고, 사람이 없고, 조직이 없고, 국가가 없고, 정의가 없다. 모든 것이 잡아먹히는 블랙홀이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이다. 그러기에 정의로운 사람의 지혜가 고삐 풀려 날뛰는 자본주의의 꼬리를 붙잡고 자본주의를 차분하게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게 바로 올바른 정치가 할 일이다. 필자는 요즘 정치의 “정(政)”을 자주 생각한다. 올바름(正)의 아버지(父)가 정(政)이다. 올바름의 도끼(斧)가 정치이기에, 정치가 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자본주의의 악행만 세상을 어지럽힐 뿐인 것이다.

대한민국이 독재의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도 그래도 국민들이 사람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게 같은 정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 게가 자식 게를 향해 자기가 걷는 모습을 시범보인 뒤 자식보고는 “똑 바로 걸으라!”고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자식이 보기에는 아비 역시 옆으로 걸었지만, 아비라는 권위 앞에서 자식 게는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아비 게가 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개 같은 정치인”들이 넘쳐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잘못되면 맑음을 지향해야 하는데, 잘못되면 시정에 앞장서야 하는데, 최근 몇 년 간의 정치를 되돌아보면 반대로 역행하는 몇 가지 기본적 패턴을 보게 된다.

첫째는 잘못함에 대한 지적에 대해 “너도 이러저러해서 잘못하고 있다”는 양비론을 주장하는 방법이다. 너나 내가 똑 같으니 시시비비를 가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잘못에 대한 시정이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러한 잘못은 결국 반복 누적되어 더욱 큰 적폐로, 암덩어리로 자라게 되어 수습이 불가능하게 된다. 둘째는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그 문제를 밀어내 버리는 방법이다. 이러저러한 어용 언론, 어용 단체, 어용 기관들을 이용하여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 내어 속도의 시대를 악용해 버리는 편법을 쓴다. 그러니 앞서의 이슈 역시 해결되지 못한 채 뒤에 오는 이슈에 밀려 시간이 지나면 점차 잊혀져 버리는 것이다. 셋째는 어떤 문제가 지적되면 그 문제를 지적한 자의 도덕성을 들춰내어 들춰낸 자의 도덕적 권위를 무너뜨림으로써 그 들춰낸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켜 버리는 방법이다. 넷째는 문제를 제기하는 자의 돈줄, 즉 밥줄을 끊어버리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거래처를 잘라 버리고. 일가친척 등 누구든지 사업을 방해하거나 취업을 방해하거나 등등 고립무원의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다섯째, 오히려 돈맛을 알게 하는 방법이다. 떡밥을 제시하여 돈맛, 향락의 맛을 맛보게 하여 비판자에게 오물을 뒤집어 씌워 같이 썩어지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사법부는 썩지 않는 연꽃이어야 한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쯤 되면 아래 줄기가 더욱 굵어지는 연꽃을 닮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사람의 식탁에 올라오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연꽃이 기관지 질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제대로 숨 쉬게 하듯, 사법부는 연꽃 속 통로를 통해 세상 사람을 살아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돈 몇 푼에 앞장서 사람의 목을 죄고, 목숨줄을 끊게 한다면, 그것은 천벌을 받을 죄악이다. 만다라(曼陀羅)는 불법(佛法)의 모든 덕을 모두 갖춘 높은 경지를 일컫는 상징어이다. 연꽃을 오죽하면 만다라화라고 할까.

검찰권과 사법권의 진정한 독립이 아쉽다. 검찰 권력이 돈맛을 알고, 권력맛을 알고, 환락맛을 알면 제대로 법집행이 이뤄질 수 없다. 예전에는 그래도 독야청청하며 세상의 혼탁함을 꾸짖는 어른, 용기 있는 대인들이 있었다. 잘못된 권력에 자리를 걸고 대항하고, 의기를 지키는 자들이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검찰총장이 그 용기를 잃어버렸다. 도덕심을 잃어버렸고, 정의로움을 잃어 버렸다. 권력의 시녀가 되었고, 하수꾼이 되어 버렸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옳은 것을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기개를 잃어버렸다. 왜 그런 용기를 상실해 버린 것일까? 그것은 스스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끗하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깨끗하지 못한 까닭에 깨끗하지 못한 타자에게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없는 것이다. 며칠 그 자리에 더 붙어 있겠다고, 정의로운 용기를 상실해 버린 검찰총장은 그냥 월급쟁이 공무원일 뿐이다.

문제는 앞으로 당분간 이러한 깨끗한 검찰총장, 용기 있는 검찰총장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한 번 혼탁해져버린 분위기에서 성장해 온 다른 검사들 역시 비슷한 가치관과 행동지침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러는 “아니 나를 뭘로 보고?”라든지, “나는 결코 그렇지 않아!”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있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면 지금 이럴 때 앞에 나서서 “이건 아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을 하지 않으면서, 뒤에 숨어 있으면서 “나는 아닌데......”라고 중얼거린들 그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검사의 참정신이라고 할 것인가? 이때쯤이면 “젊고 깨끗한 검사”들이 나서서 “더럽고 악취 나는 썩은 선배 검사”들을 향해 “당신들 물러나시오”라고 분개할 만도 한데, 젊은 검사들은 침묵 중이다. 젊고 깨끗한 판사들이 나서서 역시 썩은 선배 판사들을 향해 같은 말을 할 법도 한데 여전히 조용하다. 그것은 또 왜 그럴까?

판사들이, 검사들이 소심한 월급쟁이 소시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의의 등불을 밝히고, 연꽃의 향기를 발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사명감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젊은 판ㆍ검사들의 치열성이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부모의 치마폭에 싸여 학원 같은 곳에서 시험기술만 익혀 한 해에 천 명, 천오백 명씩, 심지어 2천 명이 넘는 합격자를 배출한 양적 팽창 속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세대가 요즘 젊은 판ㆍ검사세대이다. 그들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거치면서 자본의 풍요를 생활 속에서 깊이 만끽하였다. 삶의 고통도, 치열성도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고, 까닭에 정의로움도 그만큼 없을 수밖에 없다. 부딪혀 깨지고 터지고 싸워본 경험이 없는 온실 속의 화초 같이 자랐으니, 혼자 나섰다가 정 맞는다는 두려움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 그들에게 앞장서서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나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온통 썩어버린 세상이 되었는데도 이처럼 조용해져버린 대한민국이 필자는 무섭다. 이런 현상을 그냥 있을 수 있는 현상으로 인식하고 침묵하는 국민의식이 두렵다. 정의로움보다 내 한 몸 안위를 걱정하는 세태가 두렵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게 같은 정치인”, “개 같은 정치인”, “사람 같은 정치인” 중 어떤 정치인이 나와야 세상이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김형준 부장검사의 비리를 둘러싸고, 황색 저널이 난무하고 있다. 내연녀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었느니 하면서 별의 별 것을 다 들춰내고 있다. 언론은 이 부분에서 자제력을 잃고 있다. 김형준 부장검사의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는 존중되어야 한다. 아무리 김형준 부장검사의 잘못이 크더라도 그들의 가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황색저널리즘의 횡포가 허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치가 썩어 올바르지 못하면, 사법부가 썩고, 언론이 썩고, 세상이 썩는다. 어떤 면에서는 피의자들을 옆에 포진시키고, 범법자들을 국회의 부적격 인사청문회결과에도 불구하고 임명을 강행하여 정의로운 질서를 무너뜨리는 청와대의 무질서가 이런 사회 무질서에 한 몫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연꽃은 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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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7-03-10 15:42:00
소위 말하는 "요즘 젊은 것들은.."의 레토릭이 사용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기성세대가 만들었으나, 그 결과적 책임을 젊은 판검사에게 넘겨버리고 마는 ..모순이 발견됩니다. 4가지 문제점을 짚으면서, '양비론'과 '다른 문제로 덮기'의 문제를 제기 하셨네요. 법조계와 정치계, 자본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이러한 문제를 정치권의 인사권의 남용문제로 "남 탓"하는 두번째 모순도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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