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60)-메모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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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60)-메모가 뭐라고
  • 신종범
  • 승인 2016.08.26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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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법률사무소 누림 변호사
sjb629@hanmail.net
http://blog.naver.com/sjb629
 

낯선 곳에 가거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다행히 누군가가 함께 있고 그가 신뢰할 수 있다면 불안과 두려움은 많이 줄어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사피의자로 경찰이나 검찰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더욱 그럴것이다. 밀폐된 조사실에서 딱딱한 의자에 홀로 앉아 수사관이나 검사의 날카로운 추궁을 받게 되면 불안과 두려움에 이성적 판단은 흔들리게 된다. 다행히 그 수사결과가 실체적 진실에 부합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고하게 누명을 쓰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오랜기간 피의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간직한 채 홀로 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최초 수사단계에서부터 변호사와 함께 조사를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법률상으로는 ‘피의자신문시 변호인의 참여’라고 하지만 통상 ‘변호인 입회’라는 말을 많이 쓴다.

변호사로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회를 하게 되었다. 구속된 아들을 위하여 부친이 필자를 변호인으로 선임하면서 다음날 피의자신문이 예정되어 있으니 입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부랴부랴 피의자를 접견하고, 피의자신문에 참여하였다. 얼마 전까지 수사의 주체였다가 수사 대상의 변호인으로 참여하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수사관의 안내에 따라 피의자 뒤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피의자에게 충분한 조력을 해 주려면 피의자 옆에 앉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수사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별다른 문제제기는 하지 않았다. 피의자신문이 시작되었고, 평온(?)한 분위기에서 신문이 이어졌다. 한동안 신문을 그냥 지켜보고 있다가 피의자와 접견하면서 확인하지 못한 내용이 진술되고, 나중에 변론를 위하여 기억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 수첩을 꺼내어 메모를 시작했다. 메모를 하니 급하게 피의자를 접견하면서 놓쳤던 부분이 명확해지고, 사건의 실체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의 변론방향의 큰 틀도 잡히는 것 같았다. 수사관은 신문을 계속 진행하면서 메모를 하는 필자를 슬쩍슬쩍 보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필자가 메모하는 것을 꽤 의식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수사관은 신문을 잠시 쉬겠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갔다 오더니 필자에게 메모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피의자신문에 방해가 되고, 수사 비밀 유지가 어렵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윗사람에게 확인하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사관의 신문시에 끼어들거나 피의자에게 진술 방향을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그냥 신문하면서 나온 이야기를 적었을 뿐인데 마치 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피의자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피의자에게 불이익이 생길까봐 알았다고 하고 메모하는 것을 중단했다. 그 후에도 여러차례 피의자신문에 참여하였는데 메모에 대하여 전혀 문제를 삼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메모를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한 곳도 있었다. 다른 변호사들과도 이야기 해보니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변호인이 피의자 신문에 참여하여 메모하는 것이 과연 허용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는 피의자신문시 변호인이 메모를 하는 것과 관련한 또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A변호사는 피의자B의 신문에 참여하면서 B의 진술내용 등을 수첩에 메모했는데 조사가 끝나자 담당 경찰이 "변호인이 메모한 내용을 토대로 피의자의 진술 번복 등을 유도해 신문을 방해했다"고 주장하며 "메모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수첩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A변호사는 수첩을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경찰의 끈질긴 요구에 피의자 신문조서에 메모를 복사해 첨부하기로 한 뒤 메모 내용을 보여주었다. 이후 A변호사는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는 A변호사의 진정을 받아들여 "피의자 측 변호인이 정리한 메모를 경찰이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변론권 침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수사기관의 변호인에 대한 메모 제출 요구 및 확인 행위는 사실상 강요가 될 수 있다"며 "메모 내용이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의 영역에 해당될 수 있고, 변호 전략이 노출돼 변호인의 조력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신문 방해 행위가 있더라도 '메모 제출 요구'라는 방법은 적절하지 못하다"며 "법령에서 허용하는 기록 환기용 메모 행위까지 위축시켜 피의자의 변호인 조력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해당 경찰서장에게 소속 경찰관들에 대해 변호인의 피의자 조력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피의자 조사 시 변호인이 작성한 메모 제시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교육할 것을 권고했다.

그동안 피의자신문 과정에서 메모를 허용해야 한다는 인권위 권고가 몇 번 있었지만 말 그대로 권고로 끝났다. 다행히 서울지방경찰청은 이번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여 일선 경찰서에 수사과정에서 변호인 조력권을 규정하고 있는 법령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지시했다. 앞으로 수사기관에서 얼마나 잘 지켜지는지 두고 볼 일이다. 수사기관은 막대한 조직과 첨단 수사장비가 있고, 압수, 수색 등 강제수사 권한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깟 메모가 뭐라고 막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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