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03)-Misty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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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03)-Misty blue
  • 차근욱
  • 승인 2016.08.1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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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조금은 병적일 정도로, 나는 낯선 마을을 좋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좋아한다고 해도 자주 가지는 못한다. 나의 일정은 항상 가득 차 있고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빡빡하니까. 게다가 써야 할 원고는 언제나 밀려있으니 낯선 마을을 좋아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낯선 마을로 훌쩍 떠나지는 못한다. 원고는 언제나 마감이 있고, 해야 할 수업도 언제나 개강이 있다. 항상 새로운 이야기, 늘 공들인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니 시간은 늘 부족할 뿐, 낯선 마을을 선뜻 찾아 나설 여유란 늘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써야 할 원고가 계속 늘다보니 잠도 줄이고 밥도 안 먹고 원고를 쓰며 지내도 시간이 부족하다. 현재도 72시간째 잠 자지 못했다. 원고란 늘 마감이 있으니까. 그러다보니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가게 될 때에도 일단 자리에 앉으면 가장 먼저 ‘쪼꼬’를 켠다. ‘쪼꼬’의 자판에 다시 손을 올린다. ‘타닥 타닥 타닥’ 경쾌한 타자음이 리듬을 타고 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기차에서 원고를 쓰다보면 몇 시간 정도 훌쩍 지나가는거야 일도 아니다. 그러니 두려울 것은 없다. 아무리 멀리, 오래 간다고 하더라도. 내겐 늘 원고 쓸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렇게 원고를 쓰다가도 우연히 보게 된 차창 밖의 세상은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키작은 집, 허름한 담장, 그리고 빨강 파랑의 지붕들과 낡은 간판의 가게들. 좁지만 정감 가득 투박히도 나 있는 시골 길. 걷다보면 길가엔 들꽃이라도 피어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겨울이 오면 이 곳의 풍경은 어떤 ‘하양’이 될지를 상상하면서.

여름의 기차는 꽤나 부산스럽다. 아이들은 울어대고 학생들은 악을 쓰며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전화에 열을 올리며 다들 여름에 들떠 있다. 휴가, 방학, 피서, 나들이.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어떤 아주머니는 서울에서 광주까지 가는 내내 전화를 했다. 전화를 쉬지 않고 큰 소리로 수많은 사람에게 전화를 하면서 그 모든 사람들에게 밥은 먹었는지를, 그리고 먹었다면 무엇을 먹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반찬은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서울에서 광주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한도 끝도 없이 강조했다. 옆에 앉았던 딸은 엄마의 그런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여기 기차야!’라고 울상이 되어서 소리쳤지만, 엄마는 손짓만을 하고 연신 전화를 한다. 상대가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하여.

새벽의 기차는 창 밖 풍경을 보기에 가장 좋을 때다. 산에는 운무가 피어나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간다. 나는 등받이가 없는 길다란 벤치에 앉아 있다. 벤치의 옆에 아직은 켜져 있는 가로등. 그리고 옥색의 하늘. 수채화처럼 물에 풀은 듯 투명한 옥색의 하늘.

나는 그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대학시절 간이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때의 공기를 떠올리곤 한다. 새소리, 이슬내음, 이제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난다는 설렘과 폐를 찔러오는 알싸이 맑은 공기, 그리고 서늘해 상쾌한 반월역의 아침. 나는 그 아침이 좋아서 길을 떠날 때면 늘 새벽차를 택하곤 했다.

시골마을이라고 어찌 삶이 낭만만 있을까 만은, 그래도 지나는 여행객의 눈에 비친 푸른 들녘 옆 마을들은, 심심해도 좋으니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고요함으로 살뜰했다. 예전에 거제도를 들렀을 때, 한 한 달쯤 지내며 원고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바다도 좋았고 바람도 좋았다. 조금은 멀리 보이는 창가 있는 방에서 글 쓰고 소일하며 쉬어 갈 수 있었으면, 싶을 만큼.

내가 만약 휴가를 얻는다면, 만약 허락이 된다면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걸어봐야지. 군에서 쓰던 전투화를 신고 괴나리 봇짐 같은 배낭 안에는 기초적인 도구만을 챙겨서. 800킬로미터가 길다고는 하지만, 두 달 동안 쉬엄쉬엄 걸으며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서 새겨 보고 싶다. 몸부림 치듯 먹고 마시고, 악 쓰듯 노래하며 해변과 계곡을 방황하는 휴가가 아니라 조용하고 무거우며 고단하더라도, 그렇더라도 마음만은 성성히 맑게 개인 순간으로. 그렇게 800킬로미터를 빠짐없이 걷다보면 번뇌도 고독도 그리움도 어느새 인가 소리 없이 지울 수 있지 않을까. 스페인의 낯선 거리에서, 그리고 이국의 낯선 마을에서 새롭게 만난 여행자들과, 자신이 보았던 세상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한다면 하늘의 구름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을까.

먼지에 뒤덮혀 목마르고 고단한 여행 길에서 올려다 볼 하늘은 지독히도 아름답겠지. 마치 완산 7봉에서의 노을처럼. 그토록 아름다운 노을 속 낯선 마을이라면, 숨이 조금 차오른다 해도 불만은 없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니까.

버리고 돌아올 수만 있다면. 소유보다는 존재로 숨을 쉴 수만 있다면, 그런 여행이라면 물집이 잡히고 손발이 터져도 그저 웃어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싸구려 노트에 싸구려 볼펜을 챙겨 가야지. 잃어버려도 마음 아프지 않을, 그런 펜과 노트를. 그리고 길 위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힐 때면 그림을 그려야지. 내가 보았던 세상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다시 철부지의 마음으로, 낙서보다 삐뚤빼뚤한 선이지만 마음에 담은 세상을 그려봐야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그림들 마저 미련없이 버리고 돌아와야지.

시골 마을의 낯선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 그리고 어쩌면 또 해맑음. 우리네 인생을 걷는 이 길도 어쩌면 한숨, 하지만 어쩌면 또 그리움. 그리움조차, 미련조차 모두 다 버리고 돌아올 수만 있다면. 모두 툴툴 털어버리고, 털어버리고,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창 밖의 세상은 나를 스친다. 그렇게 물결처럼 모두 지나고 나는 어느덧 우두커니, 하루방처럼 그렇게 앉아 그저 먼 곳만을 바라본다. 마치 9월 1일의 가을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마치 끝나버린 노래가, 어디선가 다시 들려오길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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