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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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 신희섭
  • 승인 2016.08.1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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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올림픽폐인’들이 늘고 있다. 매 2년에 한 번씩 스포츠 폐인들이 생긴다. 올림픽이 그 한 번이고 월드컵이 다른 한 번이다. 경기가 열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시차로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체로 늦은 시간이나 새벽까지 경기를 보느라 스포츠 폐인이 되곤 한다. 이번 브라질 리우 올림픽도 늦은 밤과 새벽에 경기가 있다 보니 다음날 일상에 지장을 받는 경우들이 많다. 게다가 열대야는 지속되고 매미는 또 짝을 찾아 엄청 울어대고.

올림픽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들의 선전도 있지만 유망주라고 불리는 선수들이 경기에서 어처구니 없이 패배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매일이 드라마다. 한 가지 후유증도 있다. 새벽에 옆집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리모컨으로 TV를 틀게 된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개인적으로 요즘 한국 여자 배구에 푹 빠져 있다. 지난 러시아경기에서 아깝게 지기는 했지만 체력과 기술의 열세에도 정신력으로 도전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어린 배구선수들이 팀을 위한 화이팅이나 팀의 열의를 불태우는 것으로 보면 참 대단하다. 김연경선수가 공격에 성공하고 특유의 포효를 지를 때 마다 같이 소리를 지르거나 파이팅을 외쳤다. 이성을 넘어서는 그 울컥하는 감정.

사람은 참 묘한 존재이다. 경기를 보면서 같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 ‘우리’라는 공감대.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다는 뿌듯함. 이런 것들이 이 더위를 잠깐이나마 잊게 해준다. 앞서 올림픽 ‘폐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경기를 보면서 뿌듯함을 공유하면서 일상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잊게도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비단 올림픽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나 무력감을 느낄 때, 삶의 무게를 심하게 느낄 때 그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같이 나누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올림픽 경기는 간접경험을 통해서 우리라는 공감대를 느끼는 것이라 간접경험이 있다는 차이는 있다.

이때 궁금해지는 것은 왜 인간이 공감을 나누게 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기반해 다른 이에 대한 애정을 가지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전자에 공감코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경험과 학습을 통해 공감의 능력이 생기게 된 것인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원인에 기인하든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는 ‘우리’라고 말 하고 우리라고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명칭이 연대감, 공유감, 공감등 무엇으로 부르든 우리라고 느끼는 ‘집단의식’이 있는 것이다.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의 노력에 느끼는 공감이라는 것은 인간에 대해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면서 대한민국 마크를 단 선수들에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국가대표라고 하는 선수들이 속한 ‘국가’에 대한 공유감일지 아니면 한민족이라는 ‘민족’에 대한 공유감일지가 확실하지 않다. 대체로 민족과 국가가 동일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민족-국가’에 대한 공유감은 크게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꼭 이 민족과 국가가 같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극장을 찾아 ‘인천상륙작전’을 보았다. 극단적인 평가가 있기도 했거니와 한국전쟁의 역사에도 관심도 있어서 극장을 찾았다. 실제 영화자체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엉성한 구성과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게 설정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영화전체의 구멍들을 만들고 있었다. 빠른 전개를 위해 논리 없이 넘어가는 감독의 연출은 그저 결론을 향해서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계속 강요한다.

이 엉성한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너무나 편했다. 그리고 예전에 꼭 찾아봤던 드라마들을 떠올리게 했다. 빅 모로우가 나왔던 1962년 드라마 ‘전투’와 1970년대에 동양방송에서 만들었던 ‘전우’가 떠올랐다. 냉전시기 북한과 항상 대립해 있던 때에 이들 드라마는 적군을 공격하는 용감한 ‘아군’들을 영웅처럼 그렸다. 생각해보면 아군이 쏘는 총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적군 병사들을 보면서 냉전에서의 승패논리를 쉽게 배우면서 자랐다. 웬만하면 아군은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없거나 죽더라도 적군의 악랄한 수법에 억울하게 죽었다. 적군은 죽을 때 대사가 없는데 아군은 죽기 전에 엄청 말을 많이 하면서 감동적인 유언을 남겼던 기억이 뚜렷하다.

어떤 영화평론가가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똘이 장군’의 실사판이란 평을 달았다. 정곡을 찌르는 평이다. 똘이장군이 북한군대인 늑대들을 무찌르고 돼지로 나오는 김일성을 공격하는 영화는 헐벗은 옷차림을 한 타잔 버전의 어린 소년을 영화의 중심에 두었다. 영화를 보면서 어린 시절 추석이나 설에 극장에서 보지 못한 ‘똘이 장군’을 보기 위해 TV앞에서 기다렸던 기억도 떠올랐다.

영화 평을 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는 국가주의를 강조하지만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만약 민족주의를 지향했다면 북한을 적으로 설정하고 미국을 불러들여서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을 찾는 소재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민족이 왜 외부에서 들어온 좌-우라는 이념 때문에 서로 총질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적대세력인 북한을 이기기 위해 스파이활동을 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대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보였던 인천에 상륙을 돕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감동적으로 그린다. 실제 엑스레이작전이나 맥아더장군이 만난 소년병이라는 실화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던지고자 했던 국가주의의 비장함은 극대화된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북한문제에서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국가이익과 안보를 생각하면 북한에 강력한 압박이 필요하지만 같은 민족구성원이라는 생각을 하면 북한의 인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도 된다.

국가주의가 나쁜 것이고 민족주의가 나쁜 것이고는 도덕과 철학의 문제이다.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가족으로 확장될 수도 있고 씨족 사회로 확장될 수도 있지만 국가나 민족으로 확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공감대이다. 다만 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다른 부분을 못 보게 하는 것은 걱정할 문제이다. 흔히 세뇌를 하고 관심을 분산시켜 정작 중요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국가주의 마케팅도 올림픽 마케팅과 같은 ‘우리’라는 공감대를 자극하는 한 가지 방안이다. 오래되어 케케묵었다고 생각했던 드라마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한편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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