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02)-짜장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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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02)-짜장면의 추억
  • 차근욱
  • 승인 2016.08.0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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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중식식당에 가면 결국엔 짜장면을 시키고 만다. 우동이나 짬뽕을 먹어야지, 각오를 다지며 중식식당에 가도 소용없다. 고민 끝에 주문하는 것은 결국 짜장면이니까. 배가 나올지 모르니 밀가루 음식은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맨날 시달리는 주제에 잘도 말이지.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러시리라 싶기도 한데, 탕수육만을 시켜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참 화려하면서도 허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양이나 그 양에 있어서는 탕수육 ‘소’자만으로도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차고 넘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탕수육만을 시키는 일은 역시 허전하다. 탕수육이 너무 외로워 보인 달까. 그 넓디넓은 테이블에 오직 탕수육만 혼자 덩그란히 놓여있다면 쓸쓸한 모습에 마음이 애잔하기까지 하다. 마치 엄마를 잃고서 혼자 앉아있는 어린 아이를 보듯이. 그래서 결국, 나는 짜장면을 시키고 만다.

짜장면을 시킬 때는 보통 말고 곱빼기를 시킨다. 아쉬운 것 보다는 남기는 것이 낫다 싶지만, 사실 한 번도 남겨본 적은 없다. 거기에 밥도 시킨다. 장이 남아서 버려야 한다면 나는 통일의 그 날, 북녘 동포들의 얼굴을 어떻게 떳떳하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남은 장에 밥을 비벼 먹을 수 있도록 밥도 시킨다. 하지만 먹다보면 짬뽕도 맛있어 보이는 날이 있다. 설마...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때에 따라서는 짬뽕도 시킨다. 거짓은 없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다르다.

사실 짜장면이라는 단어는 표준어가 아니니 ‘자장면’이라고 표기해야 한다며 TV에서 ‘짜장면’의 표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줄 때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짜장면’은 ‘짜장면’이다. ‘짜장면’이 ‘자장면’이 되는 순간, 그 짭짜롬 하면서도 강단 있는 짜장면 한 그릇의 맛에 물을 한 사발이나 부어버리는 느낌이 들어 싫었다. 한 사발이나 물을 부어버린 짜장면을 무슨 맛으로 먹는단 말인가. 나는 표준어라는 명분으로 ‘자장면’을 강요당할 때마다 권력의 횡포라는 기분이 들었다. 왜 계몽이라는 미명 하에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었다. 그랬기에 ‘짜장면’이 마침내 ‘짜장면’이라는 이름을 문화라는 폭력으로부터 되찾았을 때,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기뻤다. 마치 도둑맞은 이름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짜장면은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그야말로 우리의 음식이다. 비록 그 탄생은 화교 분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태어나 한국인들이 사랑한 우리의 음식이다. 돈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나 어린 시절부터 누구나 기쁜 일이 있는 날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었던 추억의 음식이다. 중국에는 없는, 중식식당에서 파는 중식메뉴인 우리음식이다. 이렇듯 우리의 음식이니, 우리가 먹는 음식에 우리가 부르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발음이 강하면 심성이 표독스러워진다는 권력자 개인의 염려로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불러야 한다고 아무리 국민들을 대상으로 나름의 계몽운동을 펼쳐본다고 한들, ‘짜장면’은 ‘짜장면’일 뿐이다.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른다고 하여, 이 세상이 더 포악해지고 더 흉폭해져 멸망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르고 싶다. 게다가 꼭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불러야만 세계평화 수호가 비로소 가능해진다고는 아무래도 생각되지 않으니까.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는 것은, 욕설을 하거나 국어를 파괴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그저 짜장면이니까 짜장면일 뿐이다.

어린 시절, 특별한 날이면 짜장면을 먹었다. 누나의 졸업식 날에 짜장면을 먹었고 내 중학교 졸업식에 짜장면을 먹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드디어 나도 어엿한 고교생이라는 해방감에 친구들과 함께 짜장면을 먹고 여의도로 자전거를 타러 갔다. 고교생이 되었다는 사실과 해방감이 무슨 상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튼 그 때에는 무언가 답답한 것이 사라져 신이 올랐다. 짜장면을 먹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내내 입 안에서 짜장면의 묘한 감칠맛이 돌았다. 나는 웃었고, 친구들 또한 신이 나서 웃었다. 짜장면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있는 우리에게 고교시절의 시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는 무적이었으니까.

이사를 하는 날에도 짜장면을 먹었다. 조금씩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짜장면을 먹는 날은 그저 조금 더 즐거운 날이었지만, 짜장면에 탕수육까지 시켜 먹는 날은 특별한 날이 되었다. 미팅 자리에서 처음 만난 남녀가 함께 하는 첫 식사로 짜장면을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어느 순간엔가 사회적 상식이자 불문율이 되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선 내심 아쉬웠다. 만일 처음 만났음에도 스스럼없이 짜장면을 함께 먹을 정도로 진정 유쾌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어쩌면 통념적 상식이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짜장면은 누가 뭐라고 해도 홀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 만들어 낸 한 그릇이 최고라고 하겠지만, 비라도 주룩주룩 오는 날이라면, 집으로 배달 시켜 먹는 즐거움 또한 각별하다. 거기에 탕수육까지 시키고 짬뽕이라도 한 그릇 더 시키는 날이면, 군만두를 서비스로 가져다주는 중화 요리 집을 기억해 두는 기쁨도 쏠쏠한 법이다. 조금은 짠 듯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고소한 기름 맛에 바삭하게도 튀겨진 만두피와 화려한 풍미가 어우러진 만두소의 조화는, 따로 주문해 먹기는 어색해도 짜장면에 덮힌 랩을 뜯고 있노라면 문득 그리워지는 맛이기도 하다.

짜장면에는 행복했던 기억, 즐거웠던 기억, 슬프지만 다정했던 기억, 외롭지만 따스했던 기억이 담긴다. 마음의 허기 때문이었을까. 언젠가 한 번은 뜻 했던 모든 일이 어긋난 뒤, 얼마 남지 않은 전 재산을 들고 이제 막 점심시간이 시작되려 할 무렵의 중식식당을 찾아가 혼자 탕수육에 짜장면, 짬뽕 세트를 주문했던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냐는 사장님의 질문에 혼자라고 답하는 나를 사장님은 잠시 의아한 듯 보기도 했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 라며 쉽게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무안해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어떤 기사를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난 모든 일에 실패했고, 돈은 하나도 남지 않아, 그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쓸쓸함에 시선 둘 곳이 필요 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눈앞에 놓인 탕수육을 시작으로 나는 꼭 꼭 눌러 담듯 먹기 시작했고 먹으면서 뭔가 서글픈 기분도 들었지만, 그저 먹는 데에만 집중해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먹는 모습이 측은했던지 사장님은 나를 힐끔 힐끔 보다가 단무지를 더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따끈한 차를 따라주시기도 했다. 이윽고 내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니 사장님은 내 테이블 곁으로 다가와 박수를 쳐 주며 ‘대단하네요!’라고 말하며 씽긋 웃었다. 홀에 있는 남자 단 둘이 서로 서로 박수를 치고 박수를 받고 있으려니 조금은 머쓱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조금은 뿌듯한 기분에 가볍게 목례를 하며 격려에 답했다. 어쩌면 짜장면 탕수육 짬뽕 세트를 먹고 박수 받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주는 넓으니까. 하지만 아마 그 당시의 나는 무척이나 허름한 옷을 입고 무척이나 초라한 표정을 한 채 사람들을 피해 그 중식식당에 앉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보기에 딱했던지 사장님은 어떻게라도 용기를 주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바보취급을 받았다거나 동정을 받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심으로 격려를 해 주고 싶었던 사장님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고, 마음을 어쩌지 못해 우격다짐으로 짜장면 세트를 먹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나는 다시 출발점에 설 용기를 내었다. 가끔은 살다가 한번 마주하는 인연일 뿐이지만 따스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을 때가 있다. 500원을 사모님 몰래 깎아주시곤 눈짓을 하던 백반집 사장님이 그랬고, 따끈한 커피 캔 하나를 손에 쥐어 주시던 편의점 사장님이 그랬고 그릇이 넘치도록 국밥에 머릿고기를 담아 주시던 할머니 사장님이 그러셨다.

가끔 세상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도 있고 아주 작지만 큰 의미가 되는 것도 있다. 이제 짜장면은 언제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이 되었지만, 짜장면이 주었던 온기의 의미만은 변하지 않았다. 뭔가 손해 봤다는 기분이 들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뒤에 화를 낸다거나 그 따위 나약한 태도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아냥조로 말 하는 사람도 있고 말없이 짜장면 한 그릇에 정을 담아 건네는 손길도 있다. 꼭 무엇이 좋고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 세상살이 각자의 역할이지만 나는 기왕이면, 아프고 슬플 때 빙긋이 웃으며 비록 싸구려라도 짜장면 한 그릇을 앞으로 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사랑도 할 줄 아는 법이고 자신이 받는 사랑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프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더 행복한 법이니까. 나는 그렇게 짜장면 한 그릇처럼 행복을 담는 인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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