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윤동주와 기형도, 그리고 표절의 기억
상태바
[칼럼] 윤동주와 기형도, 그리고 표절의 기억
  • 신재환
  • 승인 2016.06.17 13:48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재환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어제 영화 ‘동주’를 보았다. 제일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인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져 상영된다는 얘기는 진작 들었지만, 그 동안 왠지 영화를 보기가 망설여졌었다. 나에게는 한없는 존경의 대상이자 무결점 인간으로 각인되어져 있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영화를 통해 그 동안 모르던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나의 소중한 영웅에 대해 실망할 일밖에 없을 거라는 불길할 예감을 했다고 할까.

과연 ‘동주’는 좋은 연출과 좋은 배우들이 만들어낸 훌륭한 영화였다. 내가 정확하게 모르던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가 내가 정말 잘 알던 그의 시들과 함께 펼쳐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궁금했지만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송몽규라는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알게 된 것도 개운한 느낌이다. 어린 시절에 이 영화를 봤으면 윤동주 시인의 소극적인 독립운동 가담이나 우유부단해 보이는 성격에 충격과 실망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지만, 지금 나이가 되어 보니 오히려 그런 순수한 모습이 시인다워 보였다. 암울했던 시대를 살았던 그의 인간적 고뇌가 이해되는 면도 컸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나는 윤동주 시인을 정말 끔찍이도 좋아했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문고판으로 읽은 후 몇 번이고 읽고 베껴 쓰면서, 나도 윤동주 시인처럼 멋진 시를 쓰겠다는 포부를 그렸었다. 이런 이상과 달리 나의 글재주는 평범한 수준을 넘지 못했다.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가서 나도 제대로 뜻을 모르는 현학적인 단어를 적당히 나열하는 시로 입선하거나, 중학교에서 1년마다 한 번씩 발간하는 교지에 윤동주 시인의 여러 시들에서 힌트를 얻은 구성과 어휘를 섞은 표절이 가득한 시를 게재하는 정도였다. 아직도 그 당시에 국어선생님이나 문학에 조예가 깊으신 누군가가 내 시를 윤동주 시의 표절이라고 지적할까봐 가슴 졸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그게 오마쥬였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뻔뻔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으니 더 이상 이를 다툴 일은 없겠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좋은 대학을 가고 탄탄한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면서 직업 시인의 꿈은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시집을 출간하겠다는 소박한 희망만은 간직하며 시집을 사서 읽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그러던 중 신문에서 일간지 기자였던 시인의 죽음과 유작 시집에 대한 기사를 보고 큰 이끌림으로 시집 초판을 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바로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었다. 쉽게 이해되는 시도 있었고 난해한 어휘와 구성으로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시도 있었다. 요절한 천재라는 윤동주 시인과 연결된 일종의 데자뷰 현상 때문인지, 나는 기형도 시인에게 깊이 빠졌다. 그 이후에 조금씩 끄적였던 시와 산문에는 기형도 시인의 절망 속에서 희망 노래하기 버전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기형도 시인의 시도 좋아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산문들도 아주 흠모했는데, 그 영향으로 고등학교의 교지에는 짧은 단편을 창작해서 기고하기도 했다. 역시 표절과 오마쥬의 경계에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나는 판사라는 직업으로 살고 있다. 판사도 판결문이라는 글로써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는 점에서는 시인과 비슷하다. 더구나 요즘 내가 하는 판결문 작성은 모두 창작이라기보다는 대법원 판례와 동료 선후배 판사들이 이미 힘들여 작성해 놓은 판결들을 잘 분석한 후 내 사건에 맞게 재구성하여 결론을 내는 일에 가까우니 어린 시절의 작문 습관이 도움이 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100세 이전에는 시집을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나의 판결도 언젠가는 100% 창작으로 가능한 날을 꿈꾼다. 대법원 판례와 하급심 판결에 나오지 않았던 나만의 언어와 구성으로 문학적인 판결을 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좀 엉성하고 부족하더라도 진심을 담아 당사자를 설득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판결이지 않을까? 더구나 기존의 판결을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고 하는 일은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 사람인 판사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부터 나만의 문체와 언어로 구수한 인간적인 판결문을 쓰는 노력을 해서 미래 인공지능 판사의 임관에 따른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미리 대비한다면 너무 앞선 걱정일까?

오늘 밤에는 윤동주, 기형도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별을 헤며 잠들어야겠다. 시인들에 대한 질투가 판사의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소정 2016-10-15 22:47:30
잘 읽었습니다 !

윤수현 2016-06-19 20:56:47
잘 읽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