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법률은 빙산의 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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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법률은 빙산의 일각
  • 박영아
  • 승인 2016.05.27 13: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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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국민의 기초생활보장을 위해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조문이 51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보건복지부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시행을 위해 발간하는 지침은 부록과 서식을 제외하고도 374페이지에 달한다. 기초생활수급권이라는 법적 권리를 구체화하는 지침이지만, 방대하고도 복잡한 내용을 조문형식으로 정리하기 어려워서인지 매년 「****년 국민기초생활보장사업 안내」라는 책자 형식으로 발간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노령, 질병, 실직의 장기화, 근로능력 상실 등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의 소득으로 최저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률이다. 생존권에 관한 문제인 만큼, 부조를 제공할 것인지 아닌지를 행정부가 재량껏 판단하도록 맡겨 놓을만한 사항이 아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도 기초생활수급권을 국가에 최저생활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급자격에 관한 구체적 요건이 모두 하위법령과 지침에 맡겨져 있다 보니 행정부에 사실상 막대한 재량이 부여되고 있다.

그래서 최저생활을 보장받고자 하는 국민들의 여정은 멀고도 험난하다. 수급신청자는 소득이나 재산이 최저생활 유지에 모자란다는 사실 외에도, 근로능력이 없고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능력이 없거나 부양을 받을 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유를 입증하긴 쉬워도 무를 입증하기란 원래 어렵다. 그런데 행정부가 만든 하위법령과 지침은 그러한 어려움을 가중하고 있다. 하위법령과 지침은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법률만 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시행령, 시행규칙, 보건복지부 지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대표적인 복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소득 산정과 관련 반드시 주의가 필요한 것은 재산의 가액에 일정한 비율을 곱하는 재산의 소득환산, 간주부양비, 추정소득 등 실제 소득이 아님에도 소득으로 간주하는 금액들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 대해 일반적으로 100%의 소득환산율이 적용된다. 가액이 500만원인 자동차를 보유하는 경우 월 소득 500만 원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간주부양비는 “부양능력이 미약한” 부양의무자가 있는 수급(신청)자에게 부양의무자가 일정한 금액의 부양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소득에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보유와 상관없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재산도 있다. 재산조사를 하는 날을 기준으로 과거 5년 이내에 다른 사람에게 처분한 재산도 처분가액을 소비하였음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현재 보유하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고 있다. 부정수급자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보이지만, 결국 선의의 피해자를 낳을 수밖에 없는 제도설계방식이다. 제도남용으로 인한 불이익을 제3자에게 전가함으로써 공적 부조가 필요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1단계를 클리어하고 빈털터리임을 성공적으로 입증한 수급(신청)자가 다음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은 부양 의무자 기준이다.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부양능력이 없거나, 부양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부양의무자로부터 부양을 받을 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실제로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함이 명백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부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부양의무자가 징집, 실종, 수감 등 누가 봐도 “부양을 받을 수 없는” 경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양의무자가 부양을 “거부 또는 기피”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모두 “거부 또는 기피”로 포섭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보건복지부 지침은 가족관계가 “해체”되어 가족기능이 상실되었다고 볼만한 사정이 있지 않으면 “부양을 받을 수 있음”에 해당한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가족기능 상실 여부는 재량껏 판단해야 하는 사항이라고 못박고 있다. 실제로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가족기능이 상실되었다고 볼만한 사정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정을 어떻게 해서 입증할 것인가?는 아직까지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행히도 가족이 없어 부양 의무자 기준을 무사히 통과했다 하더라도, 나이가 18세 이상 64세 이하인 사람은 ‘근로능력 없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조건부 수급자로 선정되어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심지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 심혈관질환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대수술을 받은 후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오를 정도로 체력이 약해진 사람, 지능이 낮아 간단한 의사 표현도 어려워하는 사람까지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 물론 휠체어를 타고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자활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라면 반대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자활사업에 참여시킨다는 명목으로 본인의 신체조건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위의 예 중 심혈관질환으로 수술을 받은 사람은 “자활사업”의 일환으로 지하주차장 청소부로 취업한 지 3개월 만에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10년전 수술한 부위 주위에 갑자기 세균감염이 진행된 것으로 확인되어 다시 수술하였지만,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쓰러진 지 3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만 보면 위와 같은 상황들이 발생하리라고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법률은 국민에게 기초생활수급권이라는 권리를 부여했지만, 하위법령으로 내려갈수록 권리의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법률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멋도 모르고 항해하다가 수면 밑에 숨어 있는 빙산의 본체에 부딪혀 난파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데에 있다.

<공감 뉴스레터 2016년 5월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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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mlrud07 2016-05-31 14:42:20
우리 사회 현실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게끔 하는 좋은 기사입니다. 우연치 않게 한번 클릭해서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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