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자유로부터 도피? 자유에 대한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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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자유로부터 도피? 자유에 대한 집착?
  • 신희섭
  • 승인 2016.05.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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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전세계가 들썩인다. 가장 단순히 정의하면 ‘막말정치인의 부상’이고 조금 개념화하면 ‘분노 정치의 세계화’이다. ‘배설’의 정치를 갈구하는 것이 미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에서는 군소정당후보인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10만명의 범죄자를 죽여서 물고기밥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대통령공약에서 “인권법은 잊으라”고 했고 “필요하다면 혁명정부를 세우고 의회를 폐쇄하겠다”고까지 했다. 부패와 범죄에 진저리가 난 필리핀인들은 두테르테에게 40%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다.
   
미국과 필리핀에만 강경발언을 하는 정치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브라질에는 자이르 볼소나루 사회기독당후보가 있다. 지우마 호세프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그는 소수자들의 공격전략으로 삼고 있다. 아이티여성 이민자들에게 “씻지도 않고 몸을 판다”는 주장이 브라질인들의 지지를 끌어들이고 있다.
   
2008년 미국 경제위기, 2010년 유럽재정위기, 2015년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앍고 있는 유럽은 극우정당 등장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4월에 치루어진 대선 1차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오스트리아자유당의 후보인 노르베르트 호퍼가 35%의 지지로 1위에 당선되었다. 이슬람이민을 금지하고 오스트리아우선주의를 사용하겠다는 구호가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극우후보를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에 올렸다.
   
프랑스의 극우정당으로 유명한 국민전선도 2015년 12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선전을 했다. 마리 르펜은 “이슬람 난민들은 모두 가두겠다”고 하며 지지를 이끌고 있고, 아버지가 못 이룬 뜻을 성취하고자 한다. 극우에 대한 지지는 네델란드에서는 자유당에게, 스위스에서는 국민당의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을 위한 대안’정당도 독일에서 극우주의에 대한 금기를 깨고 있다. 이 신생극우정당이 3월 총선에서 3개 주에서 의석을 싹쓸이 하면서 점차 중앙정치로 진입하고 있다. 2차 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에서 극우주의의 확대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미국, 아시아, 유럽을 흔드는 극우주의의 열풍에 대한 원인 분석들은 아주 간결하다. 경제적 양극화와 이에 대한 불만이 극단적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1%의 슈퍼리치들이 세계자산의 99%를 차지하는 부정의한 상황이 분노를 일으킨다. 갑갑한 세상에 청량음료가 되면서 감정배출을 돕는다. 분노조절장치가 없으니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돌직구. 

물론 이 분석들은 타당하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고 변화무쌍한 환경변화를 경험한다. 그러니 시장원리의 숭배, 양극화, 노동강도의 증대, 인간정서를 거부하고 합리성에 기초하여 세상을 이끌려는 구조적인 추세가 인간을 무기력하지만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에서는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한 가지는 정치순환론이고 다른 하나는 이 현상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인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인지의 평가이다. 
 
정치순환론은 그리스시대부터 있어왔던 분석이다. 정치는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다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바뀐다. 그리스 사람들이 발견한 이 현상의 논리는 훌륭한 지도자 뒤에 그에 못 미치는 지도자가 등장하고 정치에 대한 혐오가 나타나며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비민주주의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다시 유능한 지도자가 체제변화를 시도하게 한다. 만약 이런 정치순환론이 타당하다면 지금 국가들의 정치는 절제된 것에서 절제되지 않는 것으로 가는 것이고 냉철한 이성보다는 날카로운 공격성과 분노를 따르는 것이다. 이 현상이 강화되면 시민들은 분노를 더 강하게 표출하고자 할 것이고 분노는 국내 소수파를 겨냥할 것이다. 다음 단계는 소수파들을 넘어서 분노의 근원을 인접국가들에게서 찾을 것이다. 공격성은 극우파들이 좋아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자양분을 토대로 자란다. 이들에게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2차대전은 그저 80년 전 역사일 뿐이다.
   
역사적 순환이 필연일 수 있다는 첫 번째 입장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과연 이 현상을 지지하는 많은 유권자들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인지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인지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의 도피’는 2차 대전 이후 유행이었던 이 주제를 가장 잘 압축해서 설명한다. 2차 대전이후 폭력과 전체주의에 유약해진 시민들을 설명하기 위해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내어 주는 ‘사사화(privatization)’도 같은 맥락이다. 일반시민들이 군중이 되면 군중심리가 작동하여 개인일 때의 합리성을 잃어버리고 집단의 광기에 쉽게 자신을 던진다는 ‘군중심리’도 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해석일 뿐이다.   
   
거대해진 사회 규모와 복잡한 사회 변화와 너무나 빠른 기술진보에 인간은 적응을 강요당한다. 그래서 복잡한 사회에 적응하기보다 사회에서 가정으로 눈을 돌려 편안함에 안주하고자 한다. 자유에 따르는 큰 책임을 위해 복잡한 논리를 배우고 따르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며 즉흥적인 판단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라는 이름의 대세를 따르는 것이다. 이때 자신에게 주어진 독립적이며 자주적인 자유는 사라지고 자유의 이름으로 순종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극우화되는 세상을 보면서 우려하는 것은 시민들이 너무나 편안하게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양극화를 해결하고 범죄를 일소하며 나와 다른 소수자를 몰아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자신의 자유삭감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함에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이 장기적으로 자유의 삭감에도 불구하고 극우정당을 선뜻 지지한다는 것은 ‘적극적 자유’를 통해 설명이 된다.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혜택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 ‘자기결정(self-rule)’을 위해 사회구조적인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적극적인 자유’를 국가 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국가가 나몰라 하던 ‘소극적인 자유’의 방관에서 국가라는 권력을 동원해서 개인으로는 처리하기 힘든 범죄들, 장기적 실업, 이민자에게 빼앗긴 일자리, 끔직한 차도르나 부르카의 이슬람 문화를 몰아내고 싶은 것이다. 내 ‘자기지배’가능성은 이들이 제거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자기 지배가능성을 위해 자신이 아닌 국가에 의존을 해야 하고 국가의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이율배반. 이런 사이에 집단으로서 가지는 자유는 늘지 모르나 개인으로서 가지는 자유는 부식되어 간다. 
 
이 시대에 우리가 보고 있는 자유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은 다른 현상이 아니다.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을 통해서 강해지겠다. 권력에 대한 의존. 자유를 버려서라도 권력에 의존하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함과 걱정은 분노의 쌍생아이다. 불안함과 걱정을 없애는 것에서 극우에 대한 회귀를 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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