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산책 126 / 재량과 산출근거
상태바
감정평가 산책 126 / 재량과 산출근거
  • 이용훈
  • 승인 2016.04.08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용훈 감정평가사

담당자에게 운신의 폭이 조금이라도 주어질 때, ‘재량이 부여된다.’고 한다. 2차로는 돼야 추월차선을 만들 수 있다. 저 앞 추돌사고로 4차선 도로가 1차선으로 좁아질 때 운전자의 답답함은, 사고 지점을 지날 때까지 거북이 운전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재량을 부여해도 문제다. 첫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이 하루 24시간을 경영할 능력이 없다. 부모가 중간 중간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정을 짜주지 않으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물론 오락을 하든지 TV를 보든지 할 텐데, 생산성 있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니 문제다. 따라서 재량은 권한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유의미하다.

정비 조합이나 민간 기업, 그리고 국가기관 등에서 감정평가 서비스를 필요로 할 때 공개경쟁입찰의 방식을 취한다. 지명 입찰도 경쟁으로 볼 수 있다. 최소한의 자격 요건만을 내 건다면 큰 제약사항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공정 경쟁이 아니다. 사전에 특정 업체에 유리하게 배점표가 만들어질 수 있다. 입찰지침과 공개된 채점지침을 보면, 그 문서를 누가 만들었는지 짐작이 될 때도 있다. 입찰에 참여하는 특정업체의 조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문구를 실어 놨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순진한 마음으로 여러 번 입찰을 준비하다가 물먹은 뒤로는 이런 공개 입찰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는 편이다. 공모기관에서 발휘하는 재량은 특혜 시비를 제기할 수 있을 정도로 과도하지만 않다면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

감정평가를 수행하는 측에서도 적지 않은 재량을 갖는다. 소송에 대한 다툼이든, 경매든, 혹은 은행 담보대출을 목적으로 하는 평가든 이를 누가 맡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할 때 승소 가능성의 잣대를 들이밀 것이다. 만약 승소 가능성이 절반은 넘어야 수임한다고 할 때, 51% 승소확률인 경우와 51%의 패소 확률인 경우 어느 누구는 둘 다 개의치 않고 또 누구는 전자만 택할 수 있다. 감정평가사의 경우 이렇게 가부를 결정할 정도의 재량은 아니다.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의 문제도 아니고 ‘맞다, 틀리다’의 판단도 아니다. 좋게 보고 더 좋게 보는 차이가 존재한다.

시장도 감정평가사의 잣대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알고 있다. 감정평가사가 스스로 어느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의뢰자가 요구하는 가격 수준을 수용할 수 있는 법인도 있고 안 된다고 고개 젓는 곳도 있으니. 그게 쌓이면 평가법인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특정 법인은 웬만하면 모든 평가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사고가 터져 몸조심하기 전까지 이 평가법인은 업무 유치 실적이 눈에 띄게 좋아질 것이다. 신설법인일수록 적극적인 영업에 나서면서 이런 전철을 밟곤 한다.

사실, 재량의 영역이 꼭 필요한 분야는 다른데 있다. 생산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든 평가결과를 내야 하는 사안에서, 원칙대로만 처리하려 하면 오히려 비생산적인 결과를 낳는 곳이다. 예컨대 불용품에 대한 매각평가를 하는 입장에서, 해체처분 해서 매각하기로 했다면 고철가격으로만 평가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분해하지 않고 재생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불용품이라면 달리 접근해야 한다. 이를 재생하려는 업체가 입찰하고자 하는 가격 수준을 평가사 입장에서 탐문, 조사해야 한다. 중량에 고철단가를 곱해 나온 결과물이 어느 누구에게나 설득력을 지니겠지만, 처분되는 불용품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되면 재량을 발휘해야 한다.

문제는 그 어떤 자료도 공식적으로 확보할 수 없을 때다. 탐문을 통해 파악한 가격수준을 지지할 수 있는 공식 자료를 내놓지 못할 때가 많다. 물건을 이전하는 비용을 보상해 줄 때 각 업체가 제시하는 견적서를 평가서에 쓸 수 없다면 이 역시 비공식자료가 된다. 등기상에 찍힌 실거래자료, 세무서에 등록된 임대차내역, 건축물의 도급공사계약서 등과 같은 공신력 있는 자료와 비교해 신뢰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어느 평가사가 ‘자료 없으면 평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원칙적인 발언이다. 그러나 반드시 평가 결과물을 내놔야 할 때가 있다. 이 때는 보고서의 미흡한 점을 감수하더라도 합리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산출근거를 흡족하게 쓰지 못하겠지만, 전문가의 재량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때가 있다.

전문가의 이 정도 재량이 이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다. 이렇게 요긴할 때 쓰라고 법에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용인해 주는 ‘운신의 폭’이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