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판타지에 대한 열광과 일상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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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판타지에 대한 열광과 일상의 현실
  • 신희섭
  • 승인 2016.01.2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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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현실에 대한 제약이 없는 상상,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 문학의 한 장르로서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 이것이 판타지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이다.

너무 철지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 조금 지났지만 2015년은 판타지가 유행인 한 해였다. 특히 영화분야에서는. 2015년 7월 22일에 개봉한 영화 『암살』은 1200만이나 되는 관객을 끌어들였다. 실제 독립군 실화와 상상의 판타지가 잘 결합된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친일행위를 한 염석정(이정재역)이라는 인물을 백윤옥(전지현역)이 처단하는 장면을 보면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에 안도한다. 더 나가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정의의 실현에 만족하는 인간심리를 잘 다독여주는 것은 확실하다. 재미있는 것은 암살이라는 수단적 부정의함을 친일파 단죄라는 결과적 정의감이 압도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타지에 대한 열광은 몇 일 뒤인 8월 5일 개봉한 『베테랑』에서 펑하고 터졌다. 2016년 1월 28일자로 영화진흥위원회의 박스오피스에서 『베테랑』은 1,34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을 하여 역대 흥행 3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에서 서도철(황정민역)로 대표되는 형사는 한국사회의 권력구조의 중심에 있으면서 사회적 악을 대변하는 재벌 3세인 조태호(유아인역)를 법의 이름으로 잡아넣는다. 형사 한 사람이 권력상층부의 왜곡된 수퍼갑질에 대해 통쾌한 복수를 유쾌하게 그렸다. 이 판타지 영화 역시 정의감에 승부수를 던진다. 죄를 짓고 미친 듯이 질주하며 도망가고자 하는 유아인을 황정민이 잡아넣는 그 마지막장면에서, 유아인을 향해 날리는 여 형사의 발차기와 걸죽한 욕 한 사발에서 정의감은 폭죽처럼 터진다.

관객은 이 여형사의 액션에 자신을 대입한다. 즉 자신이 부조리로 응어리져있던 사회의 갑을구조 혹은 구조적인 권력생태계에 한 방을 먹이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마음이 편하다. 왜 정의로운 일이 생겼으니까. 1분 뒤 막이 오르고 불이 켜져 영화관을 나오면서 팝콘 봉투를 쓰레기통에 버리기 위해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며 몰입한 그 순간만큼은 한국사회가 정의로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내부자들』도 감독판을 재개봉하면서 누적관객 900만을 넘기고 있다. 이 영화는 아주 은밀한 권력구조의 내부자들(insiders)을 보여준다. 재벌과 언론과 법조계 그리고 정치인들이 공모되어 있는 내부자들 간의 권력구조 속에서 개처럼 부려지던 조폭 안상구(이병헌역)의 복수가 결국은 법조계의 아웃사이더 검사 우장훈(조승우역)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판타지를 보여준다. 강력한 권력 앞에서 실패할 위기에 있던 조폭과 검사의 아웃사이더 카르텔의 복수극은 동영상 파일을 전국에 공표하고 대통령후보와 실제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재벌과 이를 매개해주는 언론사의 권력 카르텔을 무너뜨리면서 행복하게 결말을 맺는다.

여기서도 관객들은 정의의 안도감을 가진다. 권력 하부 층에서 공모한 범죄자 조폭과 끈이 하나도 없는 열혈검사 두 사람의 아웃사이더 연합의 승리는 약자에 대한 정의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게다가 집단성접대로 단죄를 가함으로서 관객은 도덕적 정의감차원에서 우월감을 느낀다. 권력과 도덕성을 연계한 정의 2종 세트.

2016년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는 왜 판타지에 열광할까? 판타지가 최근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현실의 벽이 높고 힘이 들수록 판타지를 통해 현실 밖의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영화 『암살』이 보여주는 것처럼 실제로 어떤 개인이 한국사회의 지난한 친일문제를 명확하게 단정하고 날카롭게 단죄할 수 있겠는가? 개인차원의 암살은 가장 단순한 처단으로 한 사람의 죄를 묻고 덮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친일에 대한 정의감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또한 누가 『베테랑』처럼 갑질로 묘사되는 재벌의 구조적인 권력을 문제 삼아서 순순히 경찰서로 연행해 갈 수 있을까? 어떤 이가 『내부자들』에서 단순하게 그려진 재벌-언론-법조계-관료로 구성된 카르텔 구조의 권력을 붕괴시킬 수 있을까?

판타지에 더 많은 이들이 빠져드는 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변화의 필요성과 가능성의 불일치 때문이다. 내부자로 지칭되는 구조적인 권력에 대한 자신이 인식하는 대립구조는 ‘구조 vs. 개인’이다. 이 인식구조를 가진 이상 개선의 가능성은 제로가 된다. 왜냐하면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정확하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게다가 정확하지 않은 실체는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그렇다고 개인들이 사회구조 앞에서 미약한 존재가 되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개인으로 존재하는 시민들은 내부자들(insiders)로 구성된 사회에 대해 부조리를 파악하고 있어도 침묵하기 쉽다. 왜? 생계가 걸려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부자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내부고발자들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도 고발 이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산다. 그 가족들은 배신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주변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내부고발자들을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들을 보호해줄 수 없는 것이다. “몇 사람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꿔? 택도 없는 소리”라고 현실의 경험으로 위안을 하면서.

그럼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포기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또한 우리는 권력구조의 강건함을 폐기하기 위해 그람시를 불러서 각성된 지식인들의 대항헤게모니 구축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사회내 권력카르텔 문제를 고치겠다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포기하는 것은 물고기 한 마리를 잡겠다고 어항을 깨는 것과 같다.

단순한 영화속 판타지를 이야기 하면서 사회구조 전반에 대한 구조적인 변혁가능성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대안구축이 이 글의 목적은 더더구나 아니다. 다만 판타지라는 이슈를 통해서 우리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그려내고 싶은 모습을 실제로 그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 판타지를 보는 것에 머물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답을 구조가 아닌 작은 것에서부터 찾아보면 좋겠다. 대가족제도가 핵가족으로 바뀐 것은 몇 사람들의 시도에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사회구조가 되어있듯이 말이다. 작은 해결책으로 ‘일상성 속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할 수 있겠다. 여기서 지식인이란 많이 배운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는 고학력이 반드시 지식인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를 갖추는 것이 더 필요하다. 예전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처럼 삶의 지혜를 생활 속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개인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통해 자신과 관계된 삶부터 순리에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부합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지배구조의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내 자식만은 그 지배구조 안으로 들어가서 편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나, 사회적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 하면서 정작 가족과 대화를 하지 않고 있는 내 모습이 있다면 이 부분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의에 대한 지식, 실천하는 지혜,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용기가 우리 ‘일상성 속 지식인들’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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