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윤의 언어논리 이야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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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윤의 언어논리 이야기(17)
  • 문덕윤
  • 승인 2015.11.2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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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윤
베리타스 PSAT 언어논리 전임

효과적인 비판은 새로운 담론을 생산한다.

비판은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 대화를 하는 방법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대화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대화의 공기에는 긴장이 감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판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때는, 이 긴장감이 합리적인 대화를 방해한다. 상대방의 다른 견해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한다. 자신의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은 합리적으로 전개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자존감을 부정당하는 정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 연인, 부부 등 개인적인 친밀감이 강한 집단일수록 상대방이 내 생각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배신감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격앙되기 쉽다. 형사 사건에서 치정으로 발생한 살인일수록 피해자의 사체가 심하게 훼손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이와 상통하는 사례일 것이다.

 

그래서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 합리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일단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체가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에서 설정하는 약속이다. 사람은 원래 본능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하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끼리의 긴장감을 위협으로 인지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 첫 번째인 것이다. 우리가 독해 훈련을 하면서 비판의 규칙을 배우는 것은 “자, 이제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비판을 할 수 있을까. 합의된 규칙이 무엇인지 알아보자.”에 해당하는 단계이다. 효과적인 비판이 살아나면 상대방과 공존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는 부정당해야 하는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을 통한 잠정협정(Modus Vivendi)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협상은 논점별로 합의하는 부분과 대립하는 부분을 정리하면서 전개되기 때문에, 담론이 풍성해지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효과적인 비판은 새로운 담론을 생산한다.

그럼 문제를 하나 풀면서 비판을 위한 규칙을 점검해 보자.

[예제]새로운 사실주의의 입장에서 ㉠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풀이시간 : 4분)

20세기 초 칸딘스키는 자신이 추구해 온 추상화 운동을 보완할 새로운 사실주의의 출현을 예견했다. 사실적 회화는 대상을 재현한다. 현대 추상화가들에 의해 선, 면, 색채 같은 순수한 형식만으로도 그림이 성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모든 그림은, 그 내용이 꽃이든 전쟁의 이야기든 세계를 묘사한 재현적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림에서의 묘사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또한 형식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장미 꽃잎의 붉은색과 윤곽선, 그것과 항아리의 흰색 면과의 대조 등이 작품의 형식적 측면들이다. 그러므로 그림에서 추구해야 할 미(美)란 재현적 내용과 형식의 균형이라고 믿었던 아카데미의 화가들은 재현과 형식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균형을 통한 미의 달성이라는 미술의 이상은 더 이상 칸딘스키 같은 예술가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재현과 형식은 각각의 길을 가게 될 것이며, 그래서 형식만을 드러내는 추상 예술이 있는 것처럼, 실제의 대상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해 형식에 대한 관심을 최소화하는 예술도 출현할 것을 예언했다.

드러낸다는 것은 베일을 벗긴다는 뜻이다. 칸딘스키에 의하면 실재를 가리는 것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친숙함이다. 우리는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진정으로 세계를 보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신발과 마주치지만, 신발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한 우리가 신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우리가 신발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본다면, 그 형태나 낡은 가죽의 재질, 닳아 버린 뒤축 등 이 모든 것이 그 자체의 ‘미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계와의 관련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 우리에게 세계로부터 한발 물러서는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의 과제인데, 칸딘스키는 전통적인 예술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이러한 과제가 충족될 수 없다고 믿었다.

사실주의는 자연에 충실하라고 가르치지만, 새로운 사실주의는 엄밀한 재현을 거부할 것이다. 드러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려지는 대상은 변형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세계에 너무나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실재를 보는 데에 필요한 거리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오히려 그와 같은 변형을 실재로부터의 이탈로 판단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익숙한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칸딘스키가 말하는 새로운 사실주의는, 사실주의라는 명칭의 오용이 된다. 실재를 꿈으로 변형시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는 이러한 변형이야말로 인간의 눈을 실재에로 열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전환은 실재로부터의 전환이 아니라 실재를 향한 전환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① 화가의 임무는 꿈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지 평범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② 보이는 대로의 자연에 충실하라는 것도 하나의 예술적 이상에 따른 기획이다.

③ 예술은 항상 무언가에 관한 것이므로, 재현적 내용을 포기할 수는 없다.

④ 친숙한 사물에 대한 왜곡 없이는 작가의 정서를 드러낼 수 없다.

⑤ 극단적이지 않았을 뿐, 예술은 언제나 형식을 추구해 왔다.

발문 읽기 : 새로운 사실주의의 입장에서 ㉡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새로운 사실주의의 관점에서 사실주의의 관점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이 무엇인지 찾는 문제이다. ㉡은 ‘칸딘스키가 말하는 새로운 사실주의는 사실주의라는 명칭의 오용이 된다.’이다. 여기서 쟁점은 ‘사실주의’라는 개념이다. 이에 대해 사실주의는 ‘사실주의’ 개념을 눈에 보이는 대로의 자연에 충실한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새로운 사실주의는 ‘사실주의’ 개념을 익숙함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상태를 제거하기 위해 대상을 변형하는 것으로 본다. 새로운 사실주의의 입장은 ‘칸딘스키가 말하는 새로운 사실주의는 사실주의라는 명칭의 오용이 아니다.’이다. 사실주의와 새로운 사실주의의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드러냄이라는 예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같다. 새로운 사실주의의 관점에서 변형은 오히려 인간의 눈을 실재에로 열어 놓은 것이다.

학생들이 이 문제를 어려워하는 이유

지문에서 사실주의와 새로운 사실주의의 관점을 정리해 보자.

 

사실주의(아카데미의 화가들

새로운 사실주의(칸딘스키)

논지

새로운 사실주의는 사실주의의 오용이다.(사실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안 된다)

새로운 사실주의는 사실주의의 오용이 아니다.(사실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해도 된다)

논거

어떤 점에서 둘이 다른지를 제시

: 차이점에 관심 있음

어떤 점에서 둘이 비슷한지를 제시

: 공통점에 관심 있음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혼란스러움을 주는 것일까? 대체적으로 우리는 반론을 하라고 하면 차이점을 제시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상대방과 대립하는 것이 비판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설계한 상황에서는 반론을 위해 공통점을 제시해야 한다. 이 부분이 문제에 숨어 있는 트릭이다. 심리적 개연성은 이성을 단련하는 훈련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한다. 어쩐지 반론을 하라고 그랬는데 공통점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감정의 영역에서 여러분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정답을 찾기 위한 방향은 정해졌다. 선택지에서 의도에 맞는 답을 찾아보자.

선택지 읽기

① 화가의 임무는 꿈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지 평범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 새로운 사실주의의 관점에서 화가의 의무는 꿈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② 보이는 대로의 자연에 충실하라는 것도 하나의 예술적 이상에 따른 기획이다.

: 예술이란 하나의 기획이다. 즉, 예술 활동에는 의도성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드러냄을 추구하는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의 자연에 충실’하는 사실주의도 드러냄을 추구하기 위한 표현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칸딘스키는 전통적인 예술의 방법, 즉 사실주의로는 더 이상 대상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예술의 과제가 충족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의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예술 방법은 대상을 변형하는 것이다. 변형이든 보이는 대로의 자연에 충실하는 것이든 공통적으로 드러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사실주의가 사실주의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반론에 해당한다.

③ 예술은 항상 무언가에 관한 것이므로, 재현적 내용을 포기할 수는 없다.

: 매력적 오답이다. 어쩐지 새로운 사실주의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선택지는 정답이 될 수 없다. 지문의 흐름을 다시 읽어보자. 지금 새로운 사실주의를 제시한 사람은 누구인가? 칸딘스키이다. 1문단에서 칸딘스키는 아카데미의 화가들, 즉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시각과 대립한다. 둘이 부딪히는 지점은 예술의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어 회화에 표현될 수 있는가이다. 칸딘스키는 형식에만 주목하는 것이 추상, 내용에만 주목하는 것이 새로운 사실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선택지에서 ‘항상’은 칸딘스키의 입장과 충돌한다. 칸딘스키는 추상도 지지하기 때문이다.

④ 친숙한 사물에 대한 왜곡 없이는 작가의 정서를 드러낼 수 없다.

: 새로운 사실주의는 친숙한 사물을 필요에 따라 변형하는 것이지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도한 그림을 통해 작가의 정서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지문에서 찾을 수 없다. 이는 새로운 사실주의의 입장에서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이 아니다.

⑤ 극단적이지 않았을 뿐, 예술은 언제나 형식을 추구해 왔다.

: 사실주의는 새로운 사실주의가 형식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지 않았다. 적절한 반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 칸딘스키는 예술이 “언제나” 형식을 추구해 왔다고 말한 적이 없다. 3번 선택지와 마찬가지로 관점의 일관성이 개진 진술이다.

정답 :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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