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시험 한국사, 논란의 여지가 있던 문제로 타산지석 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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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시험 한국사, 논란의 여지가 있던 문제로 타산지석 삼기2
  • KG패스원
  • 승인 2015.11.1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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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시즌 6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역대 한국사 기출 문제를 재점검해보고, 관련 내용을 더 명확히 공부해 보는 데에 목표를 두고자 합니다.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의 18현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2008 국가직 7급

① 회재 이언적

② 남명 조식

③ 우암 송시열

④ 하서 김인후

[정답] ②

[해설] 동방 18현 또는 동국 18현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18현인은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이다. 따라서 해당 문제에서 18현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남명 조식이다.

[출제 의도] 조선 후기 당쟁의 여파 속에서 발생한 정인홍의 회퇴변척(晦退辯斥) 사건을 묻고 싶었는지, 정말 문묘에 배향된 18명의 사람을 모두 알길 원했는지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관련 내용] 1611년 광해군 3년 발생한 회퇴변척 사건이란,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스승 조식의 시호추증과 문묘 종사를 건의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은 서인과 남인뿐 아니라 소북 대신들과도 대립을 키웠고, 성균관 유생들은 상소를 통해 이황과 이언적을 옹호하는 한편 오히려 정인홍을 성균관 유적에서 삭제시켰다.

[왜 논란이 되었을까] 문항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묘에 배향된 18인의 이름은 너무도 명확하고, 복수 정답의 여지도 없다. 다만 공무원 한국사의 시험 출제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하서 김인후라니. 이 기출 문제가 나오기 전까지 단언컨대 하서 김인후를 다루지 않은 공무원 책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하서 김인후가 중요한 인물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출제 범위는 서로 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범주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 안에서 충분히 난이도를 높이고, 변별력을 갖출 수 있다. 물론 이 문항의 경우, 김인후를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 회퇴변척 사건을 알면 비교적 정답을 찾긴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고두고 회자될 문제임은 분명하다. 불의타(예상하지 못하는 불의의 공격) 문제 하나쯤 내고 싶었던 출제자의 마음이려니 위안을 삼으면 되는지, 아니면 바로 전 해인 2007년 국가직 7급 문항에 『회재집』의 사료를 낸 것에서 어느 정도 관련 인물과 내용의 재출제를 대비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수험가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는 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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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학파의 형성과 대립

서울 문묘

[학파의 형성]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학설과 지역의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곧 학파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다시 학파를 기반으로 정파도 형성되었다. 동인은 서경덕과 조식, 이황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여 붕당의 형세를 이루었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을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동인은 다시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과 서경덕 · 조식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으로 나뉘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남명학파의 불만] 선조 때 붕당이 처음 형성되어 가장 먼저 권력을 잡은 것은 광해군 대에 북인이었다. 그들은 광해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후,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추진하고, 대동법을 시행하였으며 각종 사회 ·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40여 년을 끌던 ‘사림 5현의 문묘 종사’ 문제가 결국 북인들의 큰 불만을 야기하였는데, 기존 4현에서 이황이 사망하고 5현의 종사로 확대되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에 이황이 추가로 종사되자, 조식을 따르던 남명학파가 크게 반발한 것이다.

[정인홍과 회퇴변척] 조선 후기 산림(山林)은 단순히 은거한 인물을 상징하지 않는다. 초야의 선비를 넘어 여론을 주도하고, 나아가 국정의 방향과 운영에도 관여하며,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붕당의 흥망성쇠까지 쥐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그런 최초의 산림이 바로 북인의 영수, 정인홍이다. 정인홍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에 중용되어 대북 정권을 수립하였으며,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회재와 퇴계의 문묘 종사를 저지하려다 결국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에서 삭제되고, 인조반정으로 참형되어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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