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놀이터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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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놀이터의 기억
  • 신희섭
  • 승인 2015.10.0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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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부모들은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 얼마 전 첫째 아이가 소풍을 다녀오면서 동생선물을 사왔다. 약간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자신의 의지로 딸아이는 자기 돈을 써서 무엇을 산 첫 번째 날인데 이 돈을 동생과 선물을 나누는 것에 쓴 것이다. 돈을 사용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았는지 이번 추석명절에는 주변 친척들로부터 받은 돈을 엄마한테 순순히 넘기지 않겠다고 한다.

딸아이를 보면서 “내가 명절에 받은 용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몇 살 때였던지?”를 자문해 보았다. 그렇다. 자라다보면 자신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때가 온다. 무엇에 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내가 받은 것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때가 있었다.

아이가 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소유권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되면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교육을 할 때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시기가 한 개인의 경제관념을 키우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관건은 돈을 어떻게 쓰도록 교육할 것인지에 있다.

최근 롯데사태를 보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유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것에 대한 관념이 명확해지는 아이들에게야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일까. 이 시기에 돈과 부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즉 자신의 소유권에 대해 집착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고려할지는 아이의 인생에 다른 길을 열어줄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아이가 될 것인지 다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는 아이가 될 것인지가 결정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아이이야기에서 세상이야기로 와보자. 요즘 유산상속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유산상속은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지만 그 넘겨주는 것에 앞서 소유권자체의 사고방식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적 소유권을 늘린다는 것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어려워지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소유권에 대한 관심이 더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보니 상속문제로 부모자식간의 소송과 형제자매간 분쟁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부모입장에서는 열심히 벌어서 자식들과 싸울 소지만 늘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한국의 개인중심적 자유주의가 보여주는 사회의 어두운 모습이다.

다시 아이들 세상으로 돌아와 보면 내게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딸아이들이 다니던 어린이집 앞의 놀이터와 관련된 것이다. 두 딸아이가 다녔던 국공립어린이집 앞에는 놀이터가 하나 있었다. 어린이 집이 끝나는 시간이 비슷하기 때문에 보호자들은 어린이 집에서 하원을 한 아이들을 하나 둘 씩 놀이터에 모여서 놀게 한다. 오후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이 되는 엄마들이 서로 이야기도 하고 시간을 같이 때우기 위해서 아이들을 놀리다보니 자연스레 놀이터는 ‘방과후 교실’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놀이터에서 만들어지는 사회화과정이다. 아이들이 놀다보니 몇 몇 친한 엄마들이 간식을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고 여기에 동참하는 보호자들이 늘게 되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아이들도 다른 아이와 간식을 나누는 것이 익숙해진다. 간식이 큰 선물은 아니지만 나누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줄 수는 있다. 이런 과정은 자연스레 아이들도 친구들과 나누기를 좋아하게 만든다. 물론 개중에는 욕심 많은 아이도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태생적인 선함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어떤 환경에 노출시키는가의 문제이다. 즉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의 본질적인 질문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점진적으로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본 아이들 놀이터는 나눔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 먼저 놀 수 있는 시간을 다른 아이들과 공유한다. 놀이를 하면서 그네와 미끄럼틀을 나누어 탈 수 있는 규칙을 배우고 서로의 즐거움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다. 간식을 나누면서 나눔의 즐거움도 배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놀이자체의 재미를 나눈다. 학원에 치이기 이전 아이들 스스로가 놀이를 통해서 사회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사회가 그렇듯이 리더가 생기고 추종자들이 생긴다. 아이들은 개념화해서 배우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공감’과 ‘공유’라는 가치를 학습하게 된다. 이 학습은 아이 인생의 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자원이 될 것이다.

최근 한국정치학계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공화주의는 공공선, 공익, 공적덕성을 강조하는 정치학이론이다. 말이 복잡하지만 공익 혹은 공공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상상력의 크기에 따라 조절된다. 가족공동체, 마을 공동체, 민족공동체, 국가공동체, 유럽과 같은 지역공동체, 환경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지구공동체, 미래에는 더 관심을 가질 우주공동체 등등.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공적이익 즉 공공선이 왜 중요한지는 반드시 플라톤과 마키아벨리를 읽어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과정에서 훨씬 쉽게 배울 수 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것인지, 놀이터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심을 절제해야 하는지는 그네를 양보하면서 배우게 된다. 단체에서 욕심 많은 아이를 어떻게 설득하고 자신들만의 규칙으로 다룰 것인지는 놀이터에서 따돌리기와 다시 끌어안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운다. 그런 점에서 놀이터는 아이들의 리더십을 키우는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럿이 노는 놀이터는 개인중심의 주입식 교육을 하는 학원이 할 수 없는 또 다른 교육의 장이다. 놀이터는 학원과 기능적으로 다르지만 리더십을 키우기 더 좋은 공간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리더십이라는 것은 선천적인 측면과 후천적인 측면으로 나뉜다. 선천적인 것이 유전과 관련된 인성의 문제라면 후천적인 것은 습관과 관련된 인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천적인 부분을 통제하여 좋은 리더로 만드는 것은 운이 작동한다. 천재라는 표현처럼 하늘에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잘 태어나기를 기도해야 하는’ 불확실성을 뛰어넘으려면 리더를 ‘만들 수 있는’ 후천적인 방법으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후천적인 입장에서 리더를 육성하고 규율을 가르치는 방법은 교육과 제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플라톤이 강조했던 교육은 사회적 가치를 훈련하게 하여 리더를 만드는 방법이다. 반면에 제도는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구분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리더를 육성한다. 제도가 인간에 대한 불신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제도는 구속하는 측면이 강하다.

리더십육성에 있어서 제도보다는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육이 조금 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서 볼 때 리더를 육성하는 데는 교육이 중요하며 현재 교육이 20년에서 30년 뒤의 미래 지도자들을 만들 것이고 현재 교육실패는 미래의 공동체실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점차 아이들의 놀이터가 줄어든다. 과거 친척들과 놀았던 공간은 점차 아이패드로 대체되고 있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놀이터가 점차 사라진다. 여럿이 할 수 있는 놀이터의 공간이 학원과 게임이라는 공간으로 축소된다. 게임으로 상징화되는 이 공간은 여럿이 하는 게임도 있지만 게임자체가 가진 논리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경쟁성을 토대로 한다. 특별한 아이템을 구입해서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단계까지 갈 수 있는가가 개인들 간 경쟁을 자극한다. 서열화는 이 공간도 지배한다.

공간적 차원이나 인식적 차원의 의미에서 놀이터가 줄어들고 있다. 놀이터가 줄어들면서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공감과 공유의 기회도 줄어든다. 아이들이 크고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래야 사회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강력한 논리 앞에서 인식적인 차원의 놀이터는 축소되고 있다. 공감과 공유할 수 있는 인식의 공간을 사적이익의 경쟁과 개인의 명예가 들어서면서 부모와 아이들은 적나라한 인간 본성의 사회를 강요하고 있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의 자본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지의 논리를 침식하고 있다. 인식적인 차원에서 공감과 공유의 장인 놀이터가 줄어들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좋은 지도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국은 진짜 미래가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놀이터로 상징화되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우리의 창의력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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