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2(작가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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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2(작가 이수광)
  • 이수광
  • 승인 2015.09.1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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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70년, 명성황후 시해 120년 - 다시쓰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작가 이수광)

 연재순서 : 1.조선의 마지막 왕비,2.왕이 되고 싶은 사나이,3.여걸의 탄생4.감고당의 천재 소녀 5. 조선의 국왕 6.천하를 손에 넣다 7.도끼와 작두로 다스리라 8.경복궁에 이는 풍운

 왕이 되고 싶은 사나이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에 눈을 뜬 자영은 무릎에 턱을 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가을이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져 쓸려 다녔다. 비가 오는 것일까. 바람 소리에 섞여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시들이 서온돌(西溫突, 대궐 안 침전의 서쪽에 있는 방)에 불을 지폈을 텐데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쩌면 왜인들이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영은 난관에 봉착한 기국(碁局)처럼 실타래처럼 엉킨 정국이 풀리지 않아 불안했다.

왜인들이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보고한 이는 민영익의 집사로 활동하던 고영근이다. 그녀가 고영근을 인견한 것은 사흘 전 일이었다.

“전하를 시해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시해한다는 말이냐?”

자영은 얼음 가루가 날릴 것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고영근을 쏘아보았다.

“송구하옵니다. 소문이 그러하옵니다.”

고영근이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그는 감히 자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조선의 왕비 민자영은 우유부단한 국왕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고영근은 마흔두 살, 그녀보다 세 살이 아래다. 나이 때문에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눈에서 푸른 서슬이 뿜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만 믿고 일을 대비할 수 있겠느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느냐?”

고영근을 만난 것은 경회루 앞이었다. 보는 눈이 많아서 일부러 경회루를 택했다. 고영근은 왕궁시위대 복장 차림으로 들어와 있었다.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라는 배정자가 대궐을 함부로 드나들면서 자영을 감시하고 있었다. 배정자가 심어놓은 밀정이 궁녀들 중에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라가 무너지려고 하자 간신과 밀정이 들끓고 있었다.

“중전마마, 주위를 물리쳐주십시오.”

고영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물러나 있어라.”

자영이 호종하는 궁녀와 내시들에게 명을 내렸다. 멀리 담장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왕궁시위대 병사들이 보였다. 시위대는 이제 서양 군대의 복식을 따라 검은색 상의에 검은색 바지, 그리고 각반을 차고 있었다. 머리에는 미국 군사들처럼 모자를 쓰고 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예!”

내시와 궁녀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마마, 제물포에 있는 일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훈련대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자영은 등줄기가 서늘해져 왔다.

“날짜가 언제인가?”

“8월 22일입니다. 훈련대가 앞에 서고 일본군 수비대가 뒤에 선다고 합니다.”

“훈련대는 우리 조선의 군대가 아니냐? 어찌하여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냐?”

“그들은 일본군 장교에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범선, 남만리, 이범래, 이두황 등이 일본군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합니다.”

“하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느냐?”

“훈련대 대장을 교체하십시오. 훈련대를 중전마마께서 장악해야 합니다.”

“훈련대 대장을 누구로 교체해야 하느냐?”

“홍계훈이 적임입니다. 홍계훈은 중전마마의 사람이 아닙니까?”

자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홍계훈은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를 구원했다. 8월 22일 일본군이 대궐을 침범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영은 나뭇잎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홍계훈을 8월 20일자로 훈련대 대장에 임명했으니 내일이면 우범선과 이두황 등을 축출하고 훈련대를 장악할 것이다. 홍계훈이 훈련대를 이끌고 왕궁시위대와 함께 일본군을 저지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인가.

‘대체 이 나라를 어찌해야 하는가?’

일본군이 조선의 왕비인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치밀었다. 조선에 동학란이 일어나면서 일본과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고, 급기야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침범하여 김홍집 친일 내각을 세우고 강제로 조일협정안을 체결했다.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할 때 조선이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자영은 경복궁을 침범한 일본군을 생각하자 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일본군은 국왕과 왕세자를 인질로 잡고 왕궁시위대의 무장을 해제한 뒤에 왕궁의 보물을 모조리 약탈해 갔다. 왕궁의 보물을 수레에 실어 가는 데 자그마치 사흘이 걸렸다.

‘내 반드시 일본을 몰아낼 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나자 자영은 인아거일(引俄拒日),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를 가까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철도 부설권, 금광 채굴권을 비롯해 일본이 눈독을 들이는 이권을 모두 러시아와 미국에 넘겨주려고 했다. 일본은 맹렬하게 반발했다. 게다가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청나라에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되돌려주어야 했다. 전쟁을 하여 승리했으나 청나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은 것 외에는 큰 이익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청년들이 청나라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무엇을 얻었는가. 이토 내각은 할복하라.”

“내각은 젊은이들의 피에 답하라.”

일본인들은 대로하여 이토 내각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곳곳에서 내각을 비난하는 집회가 열리고 유인물이 뿌려졌다. 철도 부설권이나 금광 채굴권 같은 중요한 이권이 일본에 넘어오지 않자 일본인들은 조선의 왕비가 정치에 개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의 왕비를 죽여야 한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제물포의 일본 거류지에서는 왕비가 치마폭으로 우유부단한 국왕을 사로잡아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조선의 왕비를 죽여야 한다.’

일본인 거류 지역의 낭인들이 흥분하여 날뛰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왜인들이 우리 조선을 업신여기고 있다.’

자영은 그들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비통했다.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내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일본인을 한 사람이라도 죽이면 발칵 뒤집힌다. 그들을 죽이고 싶어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비가 오느냐?”

자영이 박 상궁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달이 떴습니다. 추석을 지난 지 나흘째라 달이 아주 밝습니다.”

박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었다. 자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것은 희디흰 달빛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인 모양이다. 박 상궁이 고개를 들고 자영을 응시했다.

“달구경을 하겠다. 인정이 넘었느냐?”

“아직 인정은 되지 않았습니다.”

자영이 대청으로 나오자 두 줄로 도열해 있던 궁녀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자영은 동온돌인 장안당을 힐끗 살폈다. 조선의 국왕인 재황도 잠이 오지 않는지 장안당에 불빛이 환했다. 경복궁 안에 건청궁을 새로 짓고 동온돌인 장안당에는 국왕이 거처하고 서온돌은 곤령합이라고 부르면서 왕비가 거처했다. 서온돌은 침실이고 침실 옆의 작은 누각에는 옥호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서재가 있었다.

건청궁을 나와 경회루를 걷는데 수양버들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후닥닥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일본의 첩자인가?’

자영은 첩자들이 대궐에도 숨어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첩자가 대궐에 있다면 일본인들도 그녀가 훈련대장을 교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무언가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

홍계훈을 20일자로 훈련대장에 임명한 것은 그가 동학란의 참상을 살피기 위해 전라도에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일 아침에 도착할 예정이지만 상황이 다급하니 밤중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 단풍이 떨어지고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보름달이 약간 기울기는 했으나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인정이 되었느냐?’

자영이 박 상궁에게 물었다.

“예에. 이제 종이 울릴 것 같습니다.”

자영은 보신각이 있는 종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땡…….

종루에서 인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왕비를 호종하는 궁녀와 내시들이 일제히 종루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

땡…….

인정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자 야경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딱따기를 치며 순라를 돌기 시작했다.

1895년 8월 19일. 조선왕조 5백 년의 고도인 한성은 희디흰 달빛 아래 지극히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깊은 가을밤이었다. 만호 한양 장안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고, 인적이 끊어진 정동 골목은 찬바람이 불면서 나뭇잎이 음산하게 쓸려 다니고 있었다.

풀벌레도 울음을 그치고 잠든 시간, 밤의 정령들이 망토 자락을 펄럭거리고 돌아다닐 것 같은 정동 골목은 신비스럽고 조용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착검한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대오가 한성으로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핏빛 살기가 번뜩이고 대오는 기세가 삼엄했다.

이따금 여우 울음소리처럼 음산하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한겨울 삭풍처럼 밤공기를 흔들어대고, 그 사이사이로 말을 탄 사관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질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성안은 휘영청 밝은 달빛이 교교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육조 관청을 종로에 번듯하게 세워 임진왜란 이후 모처럼 한성이 국도의 위용을 갖춘 것도 잠깐,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잡고 병자년에 일본과 강화도 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들의 조선 침략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병자수호조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조약이었다.

하오리[羽織] 바람에 일본도를 허리에 찬 일본인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들은 살벌한 기세로 한성신보사와 파성관 쪽으로 바쁘게 몰려가고 있었다. 한성신보사는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사고 파성관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이었다.

성민들은 여기저기서 불안한 기색으로 수군댔다. 성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수비대의 이동 상황은 어떤가?”

미우라 일본 공사는 정동에 있는 공사관 관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각하! 인천에 있는 우리 군대가 한성까지 무사히 잠입했습니다.”

스기무라 후카시 1등 서기관이 빳빳하게 서서 대답을 했다. 미우라 일본 공사는 육군 중장 출신의 무인이었다. 외교에는 전혀 문외한이었으나 이번 작전을 위해 전권공사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스기무라 서기관, 차질 없이 해치워야 한다! 알겠나?”

“핫!”

“이 일이 열국 공사들에게 알려지면 우리는 조선 침략의 희생양이 된다. 공을 세우고도 처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내 말 알아듣겠나?”

“핫! 심려하지 마십시오, 공사 각하! 구스노세 중좌의 수비대는 특공대나 다름없는 부대입니다. 반드시 장애물을 제거하고 여우 사냥에 성공할 것입니다!”

스기무라 서기관이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미야모토 소위도 대기하고 있겠지?”

“핫!”

“미야모토 소위의 책임이 무겁다. 그가 실패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시켜야 한다!”

“미야모토 소위와 그의 부하 다섯을 낭인으로 변장시켰습니다. 겐요사 낭인 패와 함께 출발할 예정입니다.”

“좋다. 나가서 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라!”

“핫!”

스기무라가 절도 있게 경례를 한 뒤에 관저에서 물러갔다.

미우라 공사는 술잔을 든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거실 창을 통해 깊이 잠들어 있는 조선의 수도 한성을 내려다보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특히 한성은 5백 년 사직을 이어온 왕도답게 고색창연한 목조건물이 즐비했고 숲이 울창했다. 한성을 병풍처럼 둘러싼 하얀 바위산, 물들인 것처럼 푸른 하늘, 수량이 풍부한 강, 때로는 연둣빛으로 때로는 초록빛으로 옷을 바꿔 입는 조선의 사계(四季)……. 어느 날은 불이라도 붙은 듯이 붉은 단풍이 화려하고, 또 어느 날은 하얗게 눈이 내리는 조선의 사계를 그는 가슴이 시리도록 좋아했다. 정치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조선은 얼마든지 풍요롭게 잘살 수 있는 나라였다.

‘이제 이 나라는 우리 대일본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돼. 흐흐흐…….’

2층 서재로 올라간 미우라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군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인지 민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달은 중추절이 지난 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반달이었다. 거리는 달빛이 희미해 군대가 이동을 하는 것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희미한 달빛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정동으로 몰려오고 있는 일본 군대가 믿음직스러웠다.

조선의 군대는 허울뿐이었다. 일본군은 이미 지난해에도 경복궁을 점령한 일이 있었다.

‘오늘은 조선의 왕비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미우라는 머릿속에 한 여인의 기품 있고 우아한 얼굴이 떠오르자 전신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일본의 조선 침략 정책은 그 여인 때문에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도서출판 북오션 :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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