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작가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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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작가 이수광)
  • 이수광
  • 승인 2015.09.0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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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률저널 기획연재-8회로 끝나는 연재소설

- 해방70년, 명성황후 시해 120년 - 다시쓰는 나는 조선의 국모다(작가 이수광)

연재순서 : 1.조선의 마지막 왕비,2.왕이 되고 싶은 사나이,3.여걸의 탄생4.감고당의 천재 소녀 5. 조선의 국왕 6.천하를 손에 넣다 7.도끼와 작두로 다스리라 8.경복궁에 이는 풍운

조선의 마지막 왕비

왕비는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일까. 왕비의 방 사방에 있는 황금 촛대에서 불빛이 꺼질 듯이 일렁거렸다. 여자는 허리를 숙인 채 왕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선의 왕비는 한낱 가냘픈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양의 호걸이라고 불리는 국왕의 생부 대원군 이하응도 제대로 맞서지를 못했다. 지략과 지모가 출중하여 세상을 뒤흔든 여인이다.

‘하지만 오늘 밤에 죽을 것이다.’

여자는 숨을 죽이고 조선의 왕비를 쏘아보았다. 키는 작았지만 거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희고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약간 기름한 듯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봉긋한 입술이 아름다워 보였다.

‘저 여자가 조선을 뒤흔든 철의 여인이라는 말인가?’

여자는 왕비의 얼굴을 살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왕비의 눈에서 푸른 서슬이 뿜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왕비는 재치와 총명에 있어서 조선 여인들 중에 따를 자가 없을 것이다.’

여자를 밀정으로 교육한 도야마 미치루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도야마는 음침하고 교활한 사내였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군사정보학교를 세워 수많은 밀정을 교육하여 조선에 보냈다. 사람들은 그 학교를 밀정학교라고 불렀다.

여자는 우연히 일본 우익 단체 겐요사를 설립한 도야마의 눈에 띄어 밀정 교육을 받았다. 여자는 그에게서 조선의 말, 조선의 풍속, 조선의 예절까지 5년 동안이나 교육을 받은 뒤에 조선으로 파견되어 대궐의 무수리 신분으로 숨어 있었다.

‘왕비께서는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몸이 호리호리하고 뛰어난 미인이다.’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왕비의 머리는 칠흑처럼 검고, 얼굴은 진주 가루로 만든 분을 발라 희고 창백했다. 그러나 여자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영국 여행가 비숍을 만났을 때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해박한 지식이었다.

‘왕비는 동양의 어떤 왕비들보다 지적인 여인이다. 그녀의 나라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

비숍이 왕비를 알현하고 나와서 한 말이다.

‘일본인들은 왜 저토록 총명한 왕비를 살해하려는 것일까?’

여자는 일본인들이 왕비를 죽이기 위해 대궐로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궁녀들 한 무리가 박 상궁을 따라왔다. 궁녀들이 번을 교대할 시간이 된 것이다.

“중전마마, 소인 박 상궁 문후드리옵니다.”

박 상궁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왕비가 고개를 힐끗 들고 박 상궁을 본 뒤에 최 상궁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고들 했다. 물러들 가서 쉬어라.”

왕비가 낮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예. 중전마마, 침수 편히 드십시오.”

최 상궁을 따라 낮에 번을 선 궁녀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여자도 조선의 왕비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궁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물러나 줄을 지어 처소로 향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경복궁을 비추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명절인 중추절 한가위를 지난 지 나흘째 되는 밤이었다. 경복궁 궁정에는 달빛이 사금파리처럼 하얗게 깔려 있었다.

‘오늘은 번이 조금 일찍 끝났구나.’

궁녀들의 번은 인정(人定) 소리에 맞춰 바뀐다. 인정은 조선애서 밤 10시에 28번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지 박 상궁이 조금 일찍 온 것이다.

‘왕비의 처소가 바뀌는 것이 아닐까?’

왕비의 처소가 바뀌면 그녀를 시해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지 모른다. 경복궁 안에 있는 수많은 전각들, 그 전각들 안에 왕비가 숨어버리면 며칠이 지나도 찾을 수 없다.

‘왕비의 처소를 감시해야 돼.’

여자는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나, 첩지가 빠졌나 봐.”

여자는 재빨리 머리의 첩지를 뽑아 소매 속에 감추고 뒤에 있는 무수리에게 말했다. 앞에는 최 상궁, 뒤에는 윤 상궁, 이 상궁이 서열 순서대로 가고 생각시 윤 나인, 윤 나인 뒤에 박 무수리, 그리고 여자, 여자 뒤에 김 무수리가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김 무수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른 다녀오라고 눈짓까지 했다.

여자는 앞서가는 상궁들의 눈치를 살핀 뒤에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건청궁을 향해 달려갔다. 밀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내시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에 산에 암매장을 당한다. 이미 규수 출신의 밀정 이케다 나츠카도 내시부에 발각되어 팔다리가 잘려서 매장되었다.

이름이 여름 향기[夏香]인 나츠카는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아슬아슬하게 도망을 쳤다. 벌써 두 명의 밀정이 발각된 것이다.

‘오늘밤만 버티면 돼.’

여자는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건청궁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기라도 하듯이 조용했다. 아직까지 왕비는 처소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경회루 옆의 수양버들 뒤에서 건청궁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

군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다케시마 소위는 군사들과 함께 달빛이 하얗게 깔린 길을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입에서 단내가 뿜어지는 것 같았다. 조선은 밤이 깊어 양천의 넓은 들판에 달빛이 가득했다. 벼 베기 철이 다가온 들판에는 벼들이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고, 마을의 텃밭에는 배추가 파랬다. 마을마다 담장 안에 우뚝 서 있는 감나무에는 붉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낮에 군사를 이동시켰다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낮에는 제물포에서 김포까지만 이동이 허락되었고, 밤이 되어서야 한성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김포에서 계속 달려 양화진에 이른 것이다.

“중대 멈춰!”

말을 타고 가던 중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은 일제히 행군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군사들이 모두 더운 입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오늘밤에 조선의 왕비를 죽이라고? 대체 조선의 왕비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케시마 소위는 부대에 떨어진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용산에 있는 육전대도 이동을 했고 러시아 수병도 상륙하여 공관으로 이동했다고 했다. 제물포에 있는 미군과 영국군도 자국 공관을 보호하기 위해 한성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그들과 전투를 벌여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일본 육군성 내부에서는 러시아가 일본과 개전을 선언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1895년 10월 7일, 음력으로는 8월 19일이었다. 청일전쟁이 끝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아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제군들, 힘든가?”

중대장이 군사들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우리는 대일본제국 황병(皇兵)이다.”

“핫!”

“우리는 무적의 황병이다.”

“핫!”

“부대 이동!”

중대장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부대는 선 채로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케시마 소위는 군사들의 뒤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차지 않다.’

다케시마 소위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중얼거렸다. 소리 내지 않고 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대지와 초목이 불에 탄다. 끝내 광야를 내달려서, 진군하는 일장기와 철모. 말의 갈기 어루만지면서, 내일의 목숨을 누가 아는가, 생각하면 오늘의 전투에서 생긋 웃으며 죽어간 전우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목소리…….’

다케시마 소위는 소리를 내지 않고 군가를 불렀다. 힘든 행군의 고통을 잊어야 했다. 그들이 한강을 건너 만리재 고개에 이른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다케시마 소위는 만리재 고개에서 푸른 달빛에 둘러싸인 만호(萬戶) 한양 장안을 내려다보았다.

조선의 왕궁이 있는 한양은 푸른 달빛에 둘러싸여 고즈넉했다.

“몇 시인가?”

중대장이 다케시마 소위에게 물었다.

“21시 45분입니다.”

다케시마 소위가 회중시계를 들여다보고 대답했다.

“행군!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

중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이 다시 군화 소리를 내면서 서소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이 어깨에 멘 총에 꽂힌 대검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을 발했다.

땡…….

다케시마 소위가 서소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고요한 밤공기를 찢으면서 인정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가까스로 들어왔다.’

다케시마 소위는 서소문을 통과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서출판 북오션 :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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