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새로운 시작과 ‘목적있는 공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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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새로운 시작과 ‘목적있는 공부’ (1)
  • 신희섭
  • 승인 2015.03.0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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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3월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겨우 내내 잘 들어있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면서 생명이 가진 활기를 뽐내기 때문이다. 음습했던 숲에도 푸른 생명의 기운이 돌고 나뭇잎들이 다시 봄이 왔다는 것을 알린다. 거리는 검고 두터운 옷들을 벗고 밝고 얇은 옷으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3월의 공기가 사람들의 가슴속을 거쳐 온몸에 활기찬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새로운 봄을 영접하게 하고 있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움이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웅크린 채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 자연을 계기로 하든 아니면 사회적인 습관을 동기로 하든 많은 이들은 의미있는 출발점을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봄맞이 대청소를 한다거나 개강과 함께 새로운 계획을 짬으로서 연속된 시간 안에 있는 특정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3월이 되었고 새로운 일들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수험을 준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새로 세운 인생계획에 따라 공부에 입문하는 이들도 있고 1차 시험을 보고 2차에 매진하기 위해서 고삐를 움켜쥐는 이들도 있다. 새로 준비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흥분과 설렘 뿐 아니라 걱정도 가져다준다. 영어로 봄은 spring인데 이것은 용수철처럼 생기 있게 튀어 오르는 의미도 있지만 튀어 오르는 방향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짧은 강연을 하나 하게 되었다. 이 강연의 취지도 새로 인생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강연 제목은 “목적이 있는 공부”였는데 이 주제가 3월에 인생의 새로운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도 유용할 듯 하여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그래서 셰일가스는 잠시 뒤로 미루어두려고 한다.

“목적이 있는 공부”라는 제목자체는 너무나도 일반적인 이야기라 식상해 보인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원하는 학교에 가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지적으로 자기의 눈을 뜨게 만들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공부에 시간을 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목표에 이르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서 “목적이 있는 공부”는 이미 공부자체가 가진 속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동어반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이 있는 공부”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혼용해서 사용하는 단어로 ‘목적(goal)’과 ‘목표(objective)’는 다른 것이다. 두 가지를 먼저 간단히 비교하는 것이 다음 이야기를 진행해 가기 유용할 듯하다. 목적(goal)은 철학적인 개념으로서 사물이 지향하는 바를 의미한다. 즉 존재의 이유를 말한다.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그리스 철학에서의 목적인(telos)에서 나온 것이다. 목적인은 만약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말한다. 예를 들어 악기가 있다면 악기의 존재이유는 ‘연주되는 것’이다.

반면에 목표는 사물 혹은 행위체가 지향하는 신체적이거나 심리적인 최종적인 결과를 의미한다. 이 이야기는 목표가 시간적 공간적인 지향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려운 의미라 좀 더 현실적인 사례를 들어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어떤 사람이 건강을 관리하고자 운동을 결심하고 운동을 위해서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고자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이 사람에게 6시라는 시간은 자신이 지향하는 시간적인 지향점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적 목표가 되는 것이다. 다른 예로 어떤 학생이 미국의 보스턴으로 유학을 가기 원한다면 그에게 보스턴이라는 도시와 보스턴이라는 도시에 있는 학교는 그가 도달하기를 위하는 공간적 목표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자동차회사가 회사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스포츠카 개발을 하면서 시속 100k까지 도달 시간을 4초 이내로 하고 싶다면 ‘4초 이내’라는 지향점 역시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주변에 무수히 있다. 마른 사람이 몸무게를 늘리고자 하는 것이나 뚱뚱한 사람이 살을 빼고자 하는 것을 주변에서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킬로그램은 이들에게 목표가 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마음에 안정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것도 ‘심적인 안정’이라는 지향점을 향한 것으로 이것 역시 목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4초 이내에 시속 100k를 넘기는 것은 자동차의 ‘목적(telos)’은 아니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것이 자동차가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사람과 사물을 이동시켜 주는 것이 그것의 본질인 목적(telos)이다. 마찬가지로 너무 말라서 주변사람들의 놀림을 받는 사람이 몸무게를 60kg로 늘리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목표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목적(telos)과 목표(objective)는 구분될 수 있다.

목표와 목적을 구분하고 나면 “목적이 있는 공부”라는 용어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본질적인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쓰임새가 무엇인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좀 더 어렵게 가면 내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 가지는 지향점(목표)을 찾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와 관련된 즉 그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기 위한 공부가 되기 때문에 난해한 것이다.

난해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가 보자. 목적론을 주창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목적을 행복(eudaimonia)에서 찾았다. 그가 볼 때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eudaimonia라는 용어가 현재에 정확히 행복(happiness)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공(success)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사이에 의견이 갈라진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을 통해서 다른 이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사회적 성공을 이루어 동료 시민계급으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이런 인정이 받는 것을 행복으로 본다면 성공추구나 행복추구가 모두 해석이 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인간의 본질이 행복함을 누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면 인간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할 것이다. 용감한 사람들은 장군이 되어 공동체에 기여하는 ‘목표’를 가질 것이다. 시인들은 작품을 써서 주변 시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고자 하는 ‘목표’를 세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목적은 목표보다는 큰 인생의 방향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이들에게서 인정(recognition)을 받고자 한다면 인정받고자 함은 목적이 될 수 있다.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을 하며 살고 있다. 공부를 통해 의미있는 논문으로든 정책을 통해서 세상의 긍정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평가를 받는 방식이거나 노래를 너무 잘해서 그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 그리고 기가 막힌 손맛과 솜씨로 전국구 맛 집이 되는 것으로든 많은 이들이 인정을 받기 위한 인정투쟁을 매일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이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인정을 추구하기 위한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목적이란 추상적인 이야기의 다른 측면을 볼 수도 있다. 다른 측면을 보기 위해 한 사람의 이론을 더 소개한다. 공화주의 정치사상가인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목적론을 강조하면서 서사구조(narrative)에 주목했다. 어려운 용어인 서사구조는 인류의 대 서사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서사구조가 되는데 이 삶의 이야기가 좋은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인간에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좋은 삶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자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연계된다. 이렇게 자신의 서사구조인 삶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삶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삶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과의 삶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을 확대하면 인류전체의 서사구조 즉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조금 풀어서 이야기 하면 인류가 쓰는 대서사시 혹은 드라마가 있고 그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삶은 인류의 다른 이들의 삶과 연결되어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가진 목적이 구체화될 수 있다. 70억이 써가는 드라마에서 나의 역할을 찾는 것이 나의 ‘목적(telos)’이 되는 것이다. 의사로 혹은 소방관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해줌으로서 이 드라마의 일부를 이룰 수도 있고 정치공동체의 목적으로 행해 갈 수 있는 정치지도자로서 드라마를 부분적으로 완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목적이란 자신만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 사회적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다음 시간에도 “목적있는 공부”에 대해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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