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산책 76 / 감정평가서의 상정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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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 산책 76 / 감정평가서의 상정 ‘조건’
  • 이용훈
  • 승인 2015.01.3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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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감정평가사

지인간의 돈거래는 위험성이 다분하다. 회수가 안 될 때 돈을 건넨 자의 처신이 애매해지는 문제가 불보듯 뻔하지 않은가. 차용증 내용대로 혹은 민사 법률에 따라 칼같이 자르지 못하는 것은 오랜 기간 친밀했던 인간관계를 훼손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실리’와 ‘인간관계’를 두고 저울질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 싫다면, 차용증 없이 철저히 ‘호의’만으로 대응하면 된다. 저쪽에서 갚을 상황이 안 되면 없던 돈이 되고, 그 반대면 공돈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선의의 경제적 지원이 뒤늦게 미담(美談)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과분한 도움을 받은 자의 자수성가 소식 뒤에 이런 훈훈한, 조건없는, 선의의 돈거래가 소개될 때다.

행정청과 민간의 거래에 ‘선의’라는 것은 어색한 말이다. 규정대로 차별없이 민간을 대해야 말이 없다. 법령상 명문의 규정이 있는 경우 또는 행정청의 자유재량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고 민간이 과도한 수혜자가 될 때는, 행정청에서 큰 부담없는 족쇄를 채울 때가 있다. 조건ㆍ기한ㆍ부담 등과 같이 법률행위로부터 통상 발생하는 효과를 제한하기 위하여 표의자가 법률행위에 즈음하여 그 법률행위의 일부로서 특히 부가하는 제한을 일컫는 ‘부관’이 대표적이다. 사업시행인가와 동시에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기반시설 기부채납을 강제하는 것은 상식 수준으로 승화된 ‘부관’의 하나다. 행정청이 실질적인 관련이 없는 반대급부와 결부시키는 폐단을 막기 위해 부당결부금지의 원칙(不當結付禁止의 原則, Koppelungsverbot)이 단단히 지키고 있다.

이런저런 ‘조건’은 우리 일상생활을 도배하고 있다. ‘18세 미만 시청불가’ 딱지는 시청층의 진입장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딱지를 붙이는 대신 성인들이 원하는 수위의 콘텐츠를 채워 넣지 않는가. 케이블 방송 광고 안방주인인 대출광고는 약간의 눈속임을 쓰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최저수수료 대출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10여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평균적인 대출조건은 훨씬 열악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 요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1금융권이 아닌 사금융권에 손을 대는 것 자체가 약간의 어패가 있을 정도다. ‘신용등급과 대출기간에 따라 대출이자율은 변동될 수 있다’며 광고 끄트머리 빠른 속도로 읽어가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지금 설명한 최저수수료는 여러분의 희망사항입니다’의 다른 표현이다.

법원은 감정평가 의뢰처 중 하나다. 경매를 진행할 때, 손실 보상금에 대한 다툼이 있을 때 물건 값은 감정평가사에게 외주를 준다. 그런데 특히 보상금 증감청구에 대한 다툼에서는 종종 쌍방의 요청 사항을 받아들여 두 가지 가격 제시를 요청한다. 편입 당시 이용상황에 대한 다툼이 대표적이다. 지목은 ‘임야’인데 오래전부터 ‘전’으로 사용중이었으니, 한 쪽은 개량된 현황을 기준으로 보상금 지급을 구하고, 다른쪽은 불법 용도변경으로 몰아가며 개량전 지목을 기준으로 보상금 지급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조건’은 권위 있는 사법기관이 제시했으므로 평가자는 조금의 심적 부담도 없다. 「감정평가에 관한 규칙」도 이런 ‘조건’설정은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물건이든 현재 상태대로 몸값이 책정된다. 신상품과 중고품 시장은 물건의 상태와 거래가격 수준이 차등되지 않는가. 중고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보는 눈이 있고, 보이는 대로 사고 판다. 매매시점 당시의 물건의 상태가 거래 참여자의 흥정 기준이다. 「감정평가에 관한 규칙」6조의 ‘현황기준 원칙’은 ‘감정평가는 기준시점에서의 대상물건의 이용상황(불법적이거나 일시적인 이용은 제외한다)및 공법상 제한을 받는 상태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울창한 산림을 평가하면서 1~2년 내 펜션부지로 탈바꿈될 희망사항을 반영해, 수영장과 야외 바비큐장을 갖춘 펜션단지 가격을 내 주지 말라는 당부다.

그러나, 법원의 요청과 같이, 부득이한 조건 상정의 필요성도 있다. 이를 위해 같은 조 2항에서는 ①법령에 다른 규정이 있는 경우②의뢰인이 요청하는 경우③감정평가의 목적이나 대상물건의 특성에 비추어 사회통념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기준시점의 가치형성요인 등을 실제와 다르게 가정하거나 특수한 경우로 한정하는 조건을 붙여 감정평가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었다. 외국의 감정평가기준 중 RICS의 ‘Red Book’도 특별상정조건(Special assumptions)을 예시하고 있다. ‘결정된 계획과 사양에 따라 건축 기타 제안된 개발이 완료된 경우’, ‘기준시점에 실제로는 공실 상태지만 계약상 임대되어 있는 경우’, ‘손상된 부동산의 경우, 보험금 청구에 반영하기 위해 원상회복된 상태를 상정해야 하는 경우’등을 포함해 감정평가 시 부가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나열하고 있다.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70조 및 동법 시행규칙 대부분의 규정은 대표적인 법령 조건부 감정평가를 강제하고 있다. 토지소유자가 느끼는, 시가와 괴리되는 보상금의 진원지가 바로 해당 법률이다. 해당 사업으로 인한 개발이익을 배제하면서 토지주의 피부에 와닿는 현재 가격수준이 철저히 부인되는 특약이 있는 것. ‘표준지 조사 ·평가기준’역시 마찬가지다. 사권이 복잡하게 설정된 표준지를 평가할 때 일체의 제한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나지상정평가’원칙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의뢰인이 감정평가 조건 부가를 요청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조건이 합리적이고 적법하며 실현가능한 것인지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평가자가 진다. 도시계획의 실시 여부를 조건으로 내민 것은 용도지역 변경을 반영해 평가해 달라는 것이다. 최소한 지구단위계획 입안 단계에서 이런 내용이 검토되었다는 정도는 확인돼야 응할 수 있을 것이다. 멸실을 전제로 토지만을 평가해 달라는 조건은 양반이다. 철거가 예정된 건물을 빼고 담보를 잡겠다는 은행측의 요구는 담보평가의 안정정 측면에도 부합해 아무런 부담 없이 수용 가능하다. 사회통념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는 국·공유지 처분 평가 기준을 들 수 있다. 매각 시 용도폐지를 전제하는 「국유재산법」,「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규정의 취지는 현 상태 도로를 ‘대지예정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제값 받고 팔라는 요구는 사회통념에 부합하며 저가매각 의혹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책이다.

실무적인 측면에서 ‘조건부 평가’의 정리가 필요한 대목도 있다. 현황평가원칙의 예외로 조건부 감정평가를 허용한 것이라면, 현황의 변동사항에 ‘현존하지 않는 물건’을 포함할 수 있는지 여부다. 부가조건은 ‘기준시점의 가치형성요인 등을 실제와 다르게 가정하거나 특수한 경우로 한정하는 조건’으로 정하고 있는데, 문맥으로 봐서는 변경 항목은 물건의 상태이지, 물건의 추가는 아닌 느낌이다. 다만,「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서 현존하지 않는 분양예정자산이 현재 신축되어 있다는 조건으로 감정평가를 수행하고 있는 현실, 보상평가 이전 사업시행자의 착오로 보상 대상 건물을 철거해 버린 경우 현존 당시의 사진자료등을 참고해서 건물 보상 평가를 수행하는 예외적인 상황을 우호적으로 해석하면, 이미 그런 조건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완공된 건물만의 가치를 별도로 추계해야 한다면,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시공의 질을 담보할 확실한 방책은 없다. 설계대로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건물의 가치를 보장할 수 있는가. 토지와 일괄 평가하는 집합건물이라면, 입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해 건물의 품등이 설계 당시와 조금 달라진다고 전체 평가 결과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감정평가업자는 감정평가조건의 합리성, 적법성이 결여되거나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에는 의뢰를 거부하거나 수임을 철회할 수 있다’는 제한 규정을 꼭 숙지해야 한다. 업역 확장이라고 장밋빛 ‘소설’로 조건을 남발해 부가하면 정상적인 감정평가사도 색안경을 끼고 대할 위험이 있다. 조건의 난립, 오용의 폐해는 심각하다. 의뢰자가 제시한다고 평가의 합리성이 자동 보장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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