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분노의 정치와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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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분노의 정치와 두려움
  • 신희섭
  • 승인 2014.12.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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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 유럽의 모든 권력,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이 이 유령을 퇴치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1)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의 첫 구절이다. 이 서론을 통해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는 점과 이제는 유령이 아니라 당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목적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이 유명한 첫 구절을 보았을까?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보았을 때 한국사회는 다른 형태의 유령과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매우 거대한 것으로 분노의 폭발가능성과 그에 대한 두려움이다. 유령이라는 표현을 차용한 것은 그것이 실체이면서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이고 모호하지만 구체화되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2014년 12월은 조현아의 달이다. 조현아라는 키워드가 올해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청와대의 문건유출로 뒤숭숭한 나라를 한방에 역전시켰으니 올 12월의 인물이 될 수 있다. 그12월의 인물께서는 ‘땅콩리턴’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12월을 ‘어이없음의 달’로 만들었다. 12월 5일 미국 뉴욕의 JFK공항에서 조현아전 대한항공부사장은 자신이 부사장으로 있는 대한항공여객기에서 땅콩 과자의 서비스문제를 제기하며 고성을 지르고 이도 모자라 비행기를 회항시켜 담당사무장을 내리게 하였다. 같은 비행기에 탄 승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항공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될 이유로 비행기 회항의 역사적 순간을 같이 했다.

땅콩으로 인해 비행기가 돌아가고 서비스 책임자인 사무장이 내려서 다음 비행기로 돌아오고 기장은 비행기를 과거 마을버스 운행하듯이 손님이 원하는 대로 이동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매스컴을 타자마자 사건은 일파만파 커졌다. 어떤 사람이 말하듯이 “입을 가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욕을 하고 비난을 했다. 그 덕에 부사장의 아버지와 남편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의 상위를 차지하였다.

여론이 순식간에 극단적으로 나빠지자 조현아 전 부사장은 사과기자회견을 했고 대한항공 측은 보직해임을 시켰다. 하지만 보직해임이라는 것이 부사장으로서 직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통상적인 임금은 받으면서도 단지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자 여론의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아버지가 직접 나서 자식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국민정서를 완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자회견이후 당시 비행기를 타고 있던 담당 사무장에 대해 회사가 증거를 인멸시도를 하였다는 정황과 비행기동승객들에게 연락을 하여 모형비행기와 달력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고사건을 무마하려고 한 점이 밝혀지면서 여론은 사건자체의 황당함에 대한 비난과 함께 진정성이 없이 사건을 무마하고자 한 회장일가의 뻔뻔스럼을 추가해서 맹비난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국토부틀 통해 조사를 하였지만 조사 결과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강해졌다. 바로 검찰조사가 뒤따라 진행되고 있다. 12월 17일 검찰은 항공법 위반·항공보안법 위반·위력에 의한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고발된 조현아 전 부사장을 피고인 신분으로 불렀다.

법적처벌의 수위가 어떻게 될 것인지와 별개로 대한항공 직원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오너일가의 행동을 비난하고 나섰다. 조양호 한진그룹회장에 대한 평상시 행동을 공개하면서 이슈는 갑과 을의 관계라는 구조적인 문제로 확장되었다. 갑질을 해왔다는 내부고발들이 늘어나면서 몇 사회단체들은 불매운동까지 진행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땅콩리턴이라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보면 ‘저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시민의 힘 또는 민중의 힘 혹은 기층의 힘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 저력은 과거와 같은 경우 문제가 은폐되거나 다른 이슈들에 묻힐 수 있을 사건을 공개하고 결과에 영향을 미치며 결과를 왜곡할 수 있는 여지를 줄여주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발달과 이를 통한 여론의 결집가능성의 확대에 따른 것이다.

저력의 확대는 정치지형을 과거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다보던 시각을 아래에서 위를 향한 관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시민들과 민중들의 무력함을 털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서 민주주의정치체제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운영하게 한다는 점 역시 시민들이 소속감을 가지고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조현아 사태가 너무나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과 거의 모든 미디어나 매체들이 앞 다투어 회항문제를 넘어 갑과 을의 문제로 이슈를 확대하면서 시민들의 관심과 분노를 오너일가에게 지속시키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사태가 가져올 파장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회항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가정교육의 문제와 왕조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재벌 오너들의 전근대적인 태도와 섞이면서 법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들이 뒤엉켜버렸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감정은 집단적으로 극대화되고 있고 이번 사건을 비극적인 세월호참사와 연결하면서 사회시스템 전반의 문제와 함께 계급문제의 전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이 조현아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왜 질책만 하는가 혹은 왜 대한항공편을 드는 사람이 없는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이슈를 대처하는 것에서 우리 시민들이 지나칠 정도로 감정이 과잉되는 것이 아닌가와 이것이 정치적으로 오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강조해야 할 부분은 분노의 집중화와 집중화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부분이다. 누군가는 이 현상을 보면서 민중봉기의 사회적 기반을 이야기 했다. 부정의에 대한 반감과 함께 ‘갑과을’로 나타나는 계급적 적대감과 ‘미생’으로 대표되는 경쟁사회에서의 약자들의 상실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분노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감정의 증폭이 마치 민중봉기 혹은 민중혁명의 전야에서 나타나듯이 폭발할 기회만을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자 걸리기만 해봐”라는 날선 의식은 마치 기폭제를 찾는 듯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감정의 과잉과 분노의 확대에 대해 정부가 과도하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토부에서 검찰로 이어지는 너무나도 발 빠른 대처는 민중의 분노와 그 확산에 대한 두려움의 한 단면이다.

마치 19세기 초반 유럽을 감싸고 있던 두려움과 같이 지금 한국사회를 감싸고 있는 감정과잉과 분노확대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 두려움의 본질이 양극화에서 나온 것인지, 한국사회의 빠른 자본주의 계급화와 이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인지, 공동체의식의 붕괴로 인해 나타나는 이기적이고 원자적 인간들에 심리적 혼돈과 불안감인지, 21세기 사회변화의 급격함에 따른 적응의 두려움인지 그 원인들 간의 관계를 매우 엄밀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위의 다양한 요인들은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합리성의 개입을 지체시키고 감정의 개입 속도를 빠르게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중봉기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따른 발 빠른 임기응변식 행보나 양극화에 대한 해석을 통한 계급적 분열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폭발할 것 같은 분노의 이면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정의와 부정의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고 사회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국제적 망신까지 가져온 이 사건은 확실히 분노할 문제이며 이 문제는 최근 한국사회의 중요 화두인 정의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과연 9%대의 아버지 지분과 자신과 형제자매들이 가진 3%대의 지분으로 비행기를 돌릴 만한 자격이 있는 일인가나 다른 인간에 대한 무시를 만들어낸 천민자본주의의 관념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이며 이것을 수정하기 위해 사회는 어떤 논리와 철학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가 등은 사회가 논의하고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이 중심에 정치가 있어야 한다.

2008년 미국산소고기사건처럼 분노의 폭발이후 조용히 잊혀지고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고 다시 조용히 잊혀지는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으로 지난하겠지만 한국사회가 갖추어야 할 철학적 기준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의 사회적 분노를 줄이는 것은 발 빠른 대응에 따라 빨리 망각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지향할 정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차근차근히 정해가는 것이다.

각주)-----------------

 『공산당선언』, 카알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기연옮김 (서울 : 새날,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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