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국가 형성 제 이론에 따른 신라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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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국가 형성 제 이론에 따른 신라 형성
  • 오태진
  • 승인 2014.12.0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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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1. 국가 발전 단계의 여러 이론과 신라의 성립

1930년대 이래 한국고대의 국가발전단계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있어왔다. 일찍이 신민족주의사학자 손진태는 사회발전단계를 ‘씨족공동사회-부족사회-부족국가-부족연맹왕국-귀족국가’로 설정하였다.

1950년대에 이병도는 씨족제도가 붕괴하고 고대국가가 형성된다고 하면서, 신라의 경우 나물왕대에 고대국가체제를 이룬 것으로 파악하였고, 1960년대에 김철준은 ‘씨족사회-부족국가-부족연맹-고대국가’의 발전단계를 제시하고, 신라는 마립간시대 말기부터 고대국가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그것이 완성된 것이 진평왕대라고 하였다.

1970년대에 김정배는 ‘군사회-부족사회-군장사회-국가’의 서양의 국가발달단계를 활용하여 한국 고대국가의 기원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고, 1980년대에는 신라는 처음 군장사회에 있다가 조양동 38호묘 단계에서 새로운 사회로 변모하였다고 하였다.

새로운 사회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군장사회 다음 단계가 국가이므로, 기원전후기에 신라가 고대국가로 변모를 하게 되었다는 설명으로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어보인다. 천관우는 성읍국가에서 영역국가로의 발전단계를 설정하였다.

이 성읍국가론은 이기백이 적극 활용하여 ‘성읍국가-연맹왕국-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의 발전단계를 세우게 된다. 1980년대에는 이종욱이 서비스(Service.E.R)의 'Chiefdom' 이론을 신라의 국가 형성에 적용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을 보탠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이는 추장(촌락) 사회 단계의 사로 6촌 사회에서 시작하여 신라가 3국 중의 한 나라로 형성될 때까지를 다루며, 기원전 7세기경부터 기원후 4세기 중엽 또는 5세기 말까지에 걸친 기간을 국가형성기라 규정하고 있다.

동시에 신라사회는 추장 사회 단계의 사로 6촌-소국시대의 사로국-진한소국연맹시대의 사로국-진한제소국 정복 시대로의 사로국을 거쳐 삼국시대의 신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2. 여러 이론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과 비판 - 부(部) 체제론

앞의 논의에서처럼 부족국가를 고대국가라고 한다면, 부족국가 이후의 단계는 고대국가 발전단계가 된다. 그러나 고대국가를 국가로 본다면, 그 이전 단계는 국가형성단계라고 해야 한다.

이종욱의 설명에서도 소국시대의 사로국을 국가로 본다면 그 이후의 국가 형태는 국가발전 내지 국가발달 단계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삼국시대의 신라 이전 시기를 형성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종욱 교수 본인도 4~5세기 경까지는 신라가 국가단계에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그의 논지를 보면, 사로국 단계에서 신라는 이미 국가단계에 도달하였고, 신라의 왕은 6부의 부족장보다는 높은 지위를 가진 존재로 설명하고 있어, 명백한 입장정리가 필요한 듯하다.

루이스 모건(Morgan. L)의 이론에 토대를 둔 부족국가론이 설득력을 상실하면서, 부족국가 내지 부족 연맹체로 분류되었던 시기를 설명하는 논리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부체제론이다.

그것을 처음 주창한 노태돈교수가 그것을 의식하였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부족연맹체론이 부족이라고 부르던 것을 부(部)라고 지칭하면서 문패를 바꾸어 달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에 대해 부체제론자는 부족연맹체와 부체제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부족연맹체는 국가가 아니지만 부체제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정치체제로서 초기 고대국가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부족 연맹체론이나 연맹왕국론이 일정한 개념 정의 없이 심정적으로 사회 형태를 설명하였던 것에 비해, 부체제론은 그것을 비판하는 측의 공격을 받아 개념 정의를 하게 되면서 더욱 세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3. 부 체제론의 개념 심화와 이에 대한 비판

부체제론에서는 초기 고대국가를 정치적 위상이 다른 각급 자치제의 연합체로 정의하고, 그 자치제를 부라 하였다.

따라서 부체제 단계는 이미 고대국가이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 바탕을 두고, 부체제론자들은 초기신라의 경우 6세기 초반 냉수리비와 봉평비의 ‘간지(干支)’의 존재와 매금왕이나 갈문왕이 부명을 관칭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까지도 단순한 수도의 행정구역이었다고 볼 수 없고, 부의 자치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이지만 왕이 부명을 관칭하고 있어 그 전 시기 면모의 잔영을 보여준다고 하며, 6세기 초 이전 신라의 부는 자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여 부체제를 주장하였다.

물론 부체제론자라고 하더라도 학자에 따라, 신라에서 부체제가 존속되었다고 보는 시기가 다르다. 이러한 부체제론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부체제론자가 신라의 왕을 6부 가운데 한 부의 부장으로 보고 있는 데 비해, 부체제부정론에서는 신라의 왕이 사로국을 형성할 때 이미 6촌 전체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었다고 보면서, 신라의 왕이 부의 장인가, 부장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다스리는 정치적 지배자인 군주인가에 따라 한국고대사 체계는 크게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부체제 부정론자는 부체제설의 뿌리가 깊다고 본다.

1945년 이후 한국인 연구자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따른 한국고대사 체계(식민사관)를 벗어나지 못한 결과, 부체제론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부체제부정론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르 보면, 사로국 형성 이전에 6촌이 있었고, 촌에는 각기 촌장으로 지배세력으로 있었는데, 사로국이 형성되면서 혁거세는 사로국의 군주로 6촌의 촌장보다는 한 단계 높은 서라벌소국의 정치지배자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왕을 부장으로 보는 부체제설은 서라벌소국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일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비에서 왕도 소속부를 적은 원칙을, 앞의 파사이사금 23년 기사에 적용시킨다면, 파사이사금은 6부의 대표나 부장이 아니지만, 비문에는 그가 소속된 부가 기재된 표기가 나타난다. 이처럼 6부 위에 존재하여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왕을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소속 부를 기재하였다면 이는 비문 표기방식의 미숙함 이외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신라의 왕은 왕이면서 동시에 제부 중 가장 강력한 부의 장이었다는 부체제론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6부가 자치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를 단순히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보는 견해도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6부가 자치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6부의 상위에 존재하는 왕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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