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신라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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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신라의 성립과 발전
  • 오태진
  • 승인 2014.11.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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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1. 초기 신라의 건국 이야기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시조는 성이 박이고, 이름이 혁거세로, 전한(前漢) 효선제 오봉 원년(B.C 57년) 4월에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13세로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서 나뉘어 살면서 6촌을 이루었는데, 6촌은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이었다.

하루는 돌산고허촌의 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신라 시조 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나정에는 나무로 만든 목책이 둘러쳐져 있는 흔적과 기와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신성한 제사를 모시던 사당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옆 숲 속에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어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을 가르니 어린 아이가 나와서 거두어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됨에 6부의 사람들이 그 아이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삼국유사>에도 같은 내용의 신라 건국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6촌의 조상들이 조선의 유민이었다고 기록한 것에 비해 삼국유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한다.

6촌의 촌장들이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논의한 사실과 그 시기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데 비해, 삼국유사에서는 전한 지절 원년(B.C 69년)에 나라를 세울 것을 논의하고 혁거세라는 어린 아이를 얻었다고 하였다.

2. 신라 초기 통치 체제의 변천과 영남 지방 통합 과정

신라가 건국된 이후에 최고통치자의 칭호가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대왕 순으로 바뀌고, 왕실도 박씨에서 석씨로, 석씨에서 다시 박씨로, 박씨에서 석씨 등을 거치면서 결국 김씨로 바뀌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경주 지역만을 차지했던 사로국이 3세기 말까지 이서국(청도), 우시산국(울산), 거칠산국(동래), 음즙벌국(포항), 실직국(삼척), 압독국(경산), 비지국(창녕), 다벌국(대구), 초팔국(초계), 소문국(의성), 감문국(김천), 골벌국(영천), 사벌국(상주)을 차례로 이미 통합한 것으로 나오는데, 삼국지에는 사로국이 진한 12국 중의 하나로 나온다.

어떤 사료를 신빙하는 가에 따라 신라 초기 사회를 보는 입장이 학자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4세기 후반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를 연출한 대국으로 성장했다는 데에는 학계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통치 체제도 유리왕 9년에 6부의 이름을 양부, 사량부, 본피부 등으로 바꾸고, 17관등을 두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상징적으로 암시하듯이,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 통치 체제가 정비되었으며 지방 통치 체제도 지방 분권적 간접 지배 체제에서 중앙 집권적 직접 지배 체제로 변화해갔다.

3. 신라 고분 양식의 변화 - 왕권의 강화 과정

신라의 고분 양식도 지석묘에서 토광목관묘, 다시 토광목관묘-적석목곽분-횡혈식 석실분 순으로 변화해갔고, 봉분도 왕권의 신장을 반영하듯이 점차 커지고 각종 부장품도 화려해지고 많아졌다.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화려한 금관과 각종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식품 그리고 철제 무기와 농기구들은 금, 은, 동 세공기술과 제철, 제련 기술을 포함한 신라의 과학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신라사 연구에 대한 여러 문제와 전망

신라의 성립과 발전에 관한 문제 뿐 아니라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굳이 랑케의 역사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연한 명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이 필요한 이유는 신라 상고사에 대한 연구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근대 역사학에 입각하여 신라사를 처음으로 연구했던 일본인들은 내물왕 이전의 신라사를 모두 허구로 간주하여 부정하는 식민사관적 입장을 취했다.

한편, 광복 이후에는 출신 지역과 학교에 따라 신라사 연구가 크게 상이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철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어느 기록을 더욱 신빙하느냐에 따라 주장과 논점이 크게 갈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에서의 신라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자택일적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입장임이 분명해보인다.

새로운 문헌 자료의 발굴이 어렵다는 가정을 명제로 설정하고 여기에 금석문 자료의 발굴이나, 고고학 발굴에 따른 신라사 복원이 점차로 이루어질 것이 확실하기에 보다 더욱 정밀한 신라사 복원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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