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시월, 친구여 지치지 마라 제발
상태바
오시영의 세상의 창-시월, 친구여 지치지 마라 제발
  • 오시영
  • 승인 2014.10.02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시월이다. 하늘이 맑고 푸르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정신을 맑게 한다. 하지만 이 맑고 청량함은 곧 스산함으로, 살갗의 털끝을 세워 일으킨다. 차가움에 대한 몸의 보호본능이다. 시월은 이처럼 온 몸의 피부가 제 스스로 살아남겠다며 땀구멍을 좁히고, 털끝을 곧추세우는 경계의 달이다. 살아남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결단의 달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시월의 어느 날을 멋지다 하기도 하고,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바리톤 김동규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국민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김동규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한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이 가득하다고, 널 만난 것만으로도 더 이상 소원이 없을 정도라고,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하며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노래한다. 시월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수확의 계절이고, 사람 또한 한 해를 마무리할 시점이 다가온다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한 해의 중간소득을 결산해 보기도 한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며, 맑은 가을 하늘로 기분 좋아하고,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을 느낀다. 그러면서 장차 살아가야 할 이유와 더 큰 꿈을 꾸어야 하는 이유를 너에게서 찾는다. 너는 바로 나이고, 우리 모두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땅 대한민국의 우리 모두인 것이다.

이용은 “잊혀진 계절”을 통해 절망을 이야기한다.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날,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억한다. 쓸쓸했던 표정을 기억하고, 변명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그날을 회상한다.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꿈을 갖고 꿈을 꾸어보지만, 그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결국 슬퍼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울 수밖에 없게 된다. 두 노래의 상징어는 희망이다. 추수의 달, 시월을 통해 계절의 돌아옴을 인식하고 무언가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고치려는 희망을 본다. 하지만 슬프게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잊혀져 가는 시월을,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무한 손짓을 하지만 이미 막차가 떠나버린 시월이 되고 마는 현실 앞에 슬퍼한다. 그러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바보 같이 또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시월이다. 유병언의 세월호 사건과 김부선의 옥수동 아파트 난방비 사건은 필자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계속 잠기게 한다. 유족의 동의 없이 여야 간에 세월호특별법의 대충 얼개가 그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제시 이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새누리당의 강고함 앞에 야당이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 과정에 우리는 차마 보지 못할 것들을 보고 말았다. 단식 중인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을 벌리는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의 후안무치함을, 지쳐 버린 유가족들이 술을 마시고 대리기사를 폭행하게 된 사건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태를, 해방 직후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단이라는 테러조직이나 다를 바 없는 조직 이름으로 새로운 서북청년단을 결성하여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일부 극우세력의 준동 같은 것 말이다.

국가는 백색테러를 조장하거나 허용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이 문명사회에서 국가가 해야 할 첫 번째 의무이다. 일부 국민의 생각이 국가 위정자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설득과 보호는 국가 법령과 행정체계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그들과 생각이 다른 국민으로 하여금 치리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조장하는 것은 무법천지를 만들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무서운 조작이다. 그 강력한 수많은 국가공권력은 어디로 가버리고, 그 문제현장에 반대하는 국민과 찬성하는 국민을 직접 맞부딪히도록 방치하는 국가가 도대체 이 문명사회에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자유민주주의국가이지만, 국민의 방종과 무질서가 허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자유의 본질은 타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의 진실규명, 그것은 왜 그렇게 노후화된 선박이 버젓이 운행될 수 있었으며, 침몰사고 발생 즉시 구조작업이 체계적으로 수행되지 못했는지, 우왕좌왕하였는지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요구는 천만지당한 요구라 할 것이다. 적확한 진실규명이 전제되어야만 사후대책을 수립할 수 있게 되고 또 다른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된다. 그 후에 유가족에 대한 보상과 상처에 대한 치유책이 강구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아니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급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수사권, 기소권 인정불가의 특별법이 특검임명에 대한 동의권의 양해 정도 하에서 타결될 듯하다. 과연 그렇게 약화되어 버린 특별법의 권한으로 조사위원회의 진실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가수 이용이 “잊혀진 계절”에서 절규하듯 부르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발생한 사건)의 꿈(진실규명)은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진실규명은 감추어져 버린 채 용두사미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점차 농후해지고 있다. 시늉만 하다 말게 되는 꼴이다.

난방비비리에 대한 김부선의 고발 또한 마찬가지이다. 진실은 한 아파트 단지에서 300여 차례의 “난방비 0원 부과”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진실규명이라고 하겠다. 우선 주민이 그 진실 -난방비 0원이 해당 입주자가 실제로 난방을 하지 않아 부과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난방을 하였음에도 계량기를 조작하거나 관리소의 묵인 하에서 부과가 부당하게 면제된 것인지-을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밝힐 일이다. 그리고 감독관청인 서울시나 구청이, 수사기관인 경찰이나 검찰이 진실을 밝히면 된다. 그래서 착오로 빚어진 것이라면 그 비용 상당액을 추징할 것이요, 난방비 0원 부과에 어떤 범죄적 고의가 있다면 이를 밝혀 형사처벌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전국 집합건물 모두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비리의 유형을 매뉴얼화하여 다시는 동일한 부정비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체계화할 필요가 있고, 정기적인 감사를 통해 비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론도 그런 방향의 사회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론을 집중화해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난방비 0원이 부과된 적이 있는 김부선이 스스로 이를 밝히고 전년도와 같은 난방비를 자진납부하였다는 사실을 수차 밝혔음에도 지상파 엠비시를 포함한 몇몇 종편방송은 김부선을 동일한 난방비 비리수혜자인 양 호도하며 진실을 왜곡하고, 물타기를 하고 있다. 여론조작을 하고 있다고 보여질 정도로 “난방비 비리의 실체”는 희석되어지고, 김부선 혼자만의 돈키호테식 돌출행동인 양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김부선은 그의 SNS를 통해 “내 조국 대한민국아, 졌다 졌어”라는 자괴감을 표출하기에 이르렀을까?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강고한 기존세력의 벽 앞에서 허물어지고, 이용의 잊혀진 계절처럼 진실은 감추어지고 슬퍼하게만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렵다.
왜 이런 현상, 진실밝히기는 사라지고 피해자나 내부고발자가 오히려 비인격적 돌출행동자인 양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마는 역전현상이 대한민국에서 반복되어 지고, 만연되어 있는 것일까?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필자는 그 근본이유는 가해자가, 내부고발당한 단체가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은폐와 엄폐의 매뉴얼이 규명과 밝힘의 매뉴얼보다 더 잘 만들어져 있고, 조직화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가해자들이 집단적으로 조직화되어 있고, 매뉴얼화되어 있고, 강고한 힘과 돈과 시간과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분화되어 있는 피해자와 내부고발자가 지치고 지쳐 스스로 “졌다, 졌어”라고 자포자기하게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세월호 피해자와 개별화된 김부선이 존재한다. 모든 이들에게 부탁한다. 제발 지치지 마라. 당장 눈앞의 싸움에서는 질지 모르지만, 역사의 긴 전쟁에서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물론 역사에서도 진실은 아흔아홉 번 져 왔다. 기록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한 번 이긴 진실은, 정의는 아흔아홉 번 자신을 이긴 부정과 비리를 단죄하는 힘이 있다. 촛불 한 자루의 밝음이 깊은 어둠을 이기듯 한 번 이긴 진실은 그 자체로 빛나는 태양이 된다. 제발 지치지 말았으면 한다. 그대의 한 호흡, 한 행동에 지금 쥐구멍에 숨어서 세월호의 비리를 감추려고, 난방비의 비리를 감추려고 공모하고 조작하는 처량한 무리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하며, 크게 한 번 웃어라,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하고 말이다.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상상하며 크게 한 번 웃어라. “비리를 저지른 쥐새끼들아, 내가 졌다 졌어” 하며 한 번 크게 웃어라. 어째 좀 시원해지지 않으시나요?

지난 1일 인천선학체육관에서 거행된 2014인천아시안게임 복싱 여자 라이트급 시상식 시상대에서 인도의 라이슬람 사리타 데비(32) 선수가 동메달 수상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준결승전에서 이겼다고 판정받은 은메달리스트 한국의 박진아 선수에게 그 메달을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끝내 그 메달을 돌려받지 않은 채 시상대에 놓아두고 자리를 떠났다. 준결승전에서 자신이 졌다는 판정결과에 대해 “판정에 한국의 홈 이점이 부정하게 작용”했다며 항의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패자는 말이 없다”는 종전의 명언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했다. 패자가 결코 승복하지 못하는 판정, 많은 이들이 홈어드밴티지가 작용했다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했음에도 심판은 부정직한 판정을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아주 나쁜 심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데비 선수는 세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동메달 수여 거부 퍼포먼스”를 통해 나타내 보였다.

이 수치를 어찌할 것인가? 부정과 비리에 젖어 있는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언제나 부정과 비리에 젖어 있어서 그 행동이 아주 자연스럽다. 자신의 행동이 일상적 부정과 비리에 젖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치심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심판이면서도 그런 부정직한 판결을 내리고도 그 판결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승패가 엇갈린 천당과 지옥이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메달수여를 과감하게 거부한 데비 선수에게 박수를 보낸다. 난방비비리를 폭로한 김부선에게 박수를 보낸다. 자신들의 요구관철을 위해 단식을 벌려온 유가족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지금 싸움에서는 졌을망정, 세월은, 역사는 당신들을 승자로 기록해 둘 것이다. 필자의 이 글도 기록으로 남아 당신들의 의로운 싸움을 후세에 알릴 것이다. 피해자들이여, 내부고발자들이여, 억울한 패자여, 제발 지치지 마라. 제발 지치지 마라......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