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기억 너머 발해의 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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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기억 너머 발해의 꿈을 찾아서
  • 오태진
  • 승인 2014.09.24 10:5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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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강사

10여 년 전, 중국 동북공정 추진이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졌을 때, 우리 정부는 대응책을 마련한다며 부산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중국이 우리 정부에 양측 모두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자면서 화해의 제스츄어를 취했을 때 우리 정부는 안도의 숨을 쓸어내리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우리 역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줄이는 동안 중국은 착실하게 연구와 지원을 가열차게 추진하여 동북공정의 이론은 완료되었다. 

이제 초중교 교과서에 그 내용이 반영된다고 한다. 거기에는 고구려 뿐만이 아니라, 고조선, 부여, 발해까지 모두 중국의 역사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우리 정부의 역사 의식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능이나 고등 고시 과목에서 역사를 제외했다가 2017년부터에야 다시 한국사 과목을 필수로 정한 정부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발해사는 이미 중국 정부와 학계에서는 중국사의 범주로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일말의 망설임도 갖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우선 우리의 역사 발해를 다뤄보고자 한다.
 
1. 초기 정책 - 내정보다는 군사, 중국(唐)부터 제압하고 보자!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인 698년에 건국한 왕조로서 고왕(高王) 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왕 대인선에 이르기까지 15대 왕이 즉위하였다. 

영토가 가장 넓었던 때의 발해는 지금의 북한 지역과 중국의 길림성, 흑룡강성 및 요령성 일부에 걸쳐 있었는데, 그 크기는 고구려보다 1.5배, 그리고 신라보다 3배 내지 4배나 되었다. 

발해의 국가 조직은 2대 무왕 대무예(719~737) 대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여 3대 문왕 대흠무(737~793) 대에 완비되고, 이후 10대 선왕 대인수(818~830)와 13대 대현석 대(871~894)에 완성되었다. 발해의 초대왕이었던 고왕 대조영은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돌궐 및 신라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건국의 명분을 대외에 과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군사적인 면에 집중한 나머지 정치에서는 조직을 정비할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이 때는 내정의 안정과 당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안으로 국가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주변의 여러 부락들을 복속시킴으로써 영토를 크게 넓혔다. 무왕의 뒤를 문왕도 안록산의 난(755~763)을 계기로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대외발전에 힘을 썼다. 

그러나 당시는 수도를 2차례나 옮길 정도로 내정에 힘을 기울인 시기였다. 수도를 중경현덕부로부터 상경용천부로 옮겼다가, 다시 동경용원부로 옮긴 것은 왕권 강화를 위해 대내적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정치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2. 중국(唐)과의 화친 정책과 왕위 쟁탈전의 전개

문왕대에 비로소 발해는 당으로부터 책봉작위를 ‘발해군왕(渤海郡王)’에서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인정받았다. 당나라가 ‘발해국(渤海國)’을 ‘발해군(渤海郡)’으로 불렀던 것은, 당의 일방적인 조처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발해의 국세와 국제적 지위가 높아지고, 안사의 난 등으로 인하여 궁지에 몰리자 발해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문왕 이후에는 여러 왕이 즉위하자마자 곧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발해의 귀족층이었던 ‘국인(國人)’들의 권력 쟁탈전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발해는 고왕의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으로 알려지고 있는 10대 선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왕권이 안정되고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해북(海北)의 제 부(部)가 토벌되어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전국을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하던 시기도 이 때였다. 13대 대현석 대에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듣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지방조직이 이 때에 완성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3. 중앙과 지방 정치 제도

발해의 중앙정치제도는 발해왕이 장자상속제를 시행하고 있었다든지, 발해가 고왕대부터 줄곧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통해서, 전제적이고 자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정치는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 체제를 중심으로 6부 1대 7시 1원 1감 1국으로, 그리고 지방은 5경 15부 62주와 3백여 군현으로 편제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성국 발해도 15대 대인선에 이르러 거란족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였으며(926), 무척이나 아쉽고 통분을 금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만주 지역의 우리 역사와 문화는 대부분 거란과 여진의 역사로 계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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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석 2014-09-28 10:33:56
짱이네요 !!

안민석 2014-09-28 10:33:56
짱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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