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1987년 체제와 한국의 민주주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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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1987년 체제와 한국의 민주주의 (3)
  • 신희섭
  • 승인 2014.09.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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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국정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가지는 불만의 핵심은 정치개혁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0년에 실시된 16대 총선에서는 “바꿔”라는 구호로 상징화된 정치적 변화의 요구가 있었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낙천과 낙선운동으로 이어졌고 대대적인 논의를 등에 없고 적잖은 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했다. 4년 뒤의 선거에서도 변화를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지만 16대 총선만큼의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판은 크게 동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이후 새로운 정치와 정치적 변화를 갈망하는 요구들은 수 없이 정치표면에 등장했다. 오죽하면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명이 만들어지기까지 했을까?

한국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정당명을 보면 된다는 농담이 있다. 한국정당의 당명은 그 시대가 지향하는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말로 한국정치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81년 전두환 정부시대의 민주정의당은 민주주의의 부족과 정의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4년의 열린우리당은 한국정치의 폐쇄성과 당파성을 개선하겠다는 취지이지만 실제로는 정치판이 “열리지도” 않았고 “우리”를 지향하지도 않았다.

한국정치에 대한 불만과 조소는 점차 강해져서 여러 기관의 여론 조사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국회의원의 신뢰도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 가장 낮으며 낯선 사람보다도 두 배 가량 낮게 나오는 여론 조사 결과도 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만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농담처럼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가문까지 몰락하게 만들려면 여의도로 보내라”는 말까지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정치에 대한 불만과 정치인에 대한 비난은 애증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한국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한국정치에 절망하기도 하지만 정치를 통한 변화가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정치가 개입하지 않고서 체계적인 사회변화를 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정치에 걸어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변화를 꿈꾸는 것은 여의도에 있는 의원들만은 아니다. 한국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한국정치에서 아직도 변화가 유효할 수 있다고 보고 그 가능성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치체제가 걸어온 길과 그 과정이 던지는 역사적인 의미를 다루어야 한다.

하나의 정치체제는 진공상태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왔고 이 과정 속에는 다양한 이들이 정치적 과정에 연루되어 있다. 이 집단들의 정치적 개입으로 정치과정 자체는 정치적 투쟁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그 당시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에 대해 정치적 권력관계와 이해관계가 결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7년 민주화당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는 사람들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졌던 상황을 생각해보자. 초기에는 강경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6.29선언이후에는 온건파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이러한 역학관계의 변화는 1987년 이후 한국정치의 정치지형을 온건파중심의 민주주의판으로 구성하게 했다.

이런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 필요한 개념이 ‘경로의존성(path-dependence)’이다. 경로 의존성이란 한 차례의 역사적 결정이나 사건이 그 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한번 사건이 이루어지면 이 사건은 다음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사건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이다. 과거 코미디 프로였던 ‘인생극장’이란 코너에서는 두 가지 방안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면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처럼 한 번 결정된 사건은 그 다음의 과정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학문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경로의존성이다. 경로의존성이란 개념은 최근 신제도주의 중에서도 역사적 제도주의가 강조하는 개념으로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경로의존성에 대해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 보자. 경로의존성은 한 가지 사건의 역사적 궤적이 지속됨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제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로의존성은 제도적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어제의 제도적 틀이 오늘의 정치참여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데이빗(P. David)과 아더(B. Arthur)에 의해 발전된 개념이다.1)

경로의존성은 추가적으로 두 가지 명제를 가져온다. 첫 번째는 ‘역사 중요성 명제’이다. 역사적 중요성 명제는 제도가 역사가 부여하는 경로를 따른 다는 점에서 역사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진화실패명제’이다. 진화실패명제란 제도가 역사적인 경로를 통해서 비효율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종합하면 한번 구성된 제도가 역사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만 그 역사적 영향력이라는 것이 가지는 규정력이 크기 때문에 제도가 반드시 발전적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이론가들에게 경로의존성은 중요한 이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민주주의가 만들어질 때 정해진 패턴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민주주의국가들로 정치체제가 전환된 국가들은 체제변화 이전에는 비민주주의 국가였다. 이들 나라들이 비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정치체제의 변화 즉 민주주의 ‘이행(transition)’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들 나라에서 비민주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과 민주주의로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 정치적 투쟁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투쟁은 제 각각의 모습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게 한다.

민주주의 이행을 경험한 동구권국가들에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지거나 민중혁명이 일어나 기존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을 거친 경우가 많다. 이 과정은 실제로 목숨을 건 싸움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유혈투쟁을 가져왔다. 최근 리비아와 시리아에서의 민주화 투쟁에서 보인 유혈사태가 유사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민주화인사가 권력을 장악하면 기성 권위주의 세력은 제거되며 이러한 정치적 숙청을 거부하는 권위주의인사들은 무력을 사용해서 민주화 세력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군부의 입장이 어떤 편에 서는지가 중요해지면서 민주화과정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폭력적 과정을 거친 민주주의 이행과정은 극단적인 결과를 창출하게 된다. 급격한 민주주의를 구축하거나 민주화 인사가 거세된 상태에서 다소 유화적인 정책을 펴는 권위주의 정부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민주파가 승리하여 민주주의를 구축하게 된다면 권위주의 세력이 거세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써내려 갈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경로가 급속하게 진행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조기사망가능성을 넘어서는 이런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가 급격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정치개혁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반면에 한국처럼 민주화과정이 기성권위주의세력과 민주화세력간의 타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다른 경로를 거치게 된다. 민주화 과정에서 목숨을 빼앗는 극단적인 과정이 없기 때문에 유혈사태를 부른 힘의 행사보다는 타협과 협상이 민주화과정을 지배하게 된다. 양측 세력은 각자의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게 된다. 민주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양보받으면서 선거정치를 통해서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에 의한 정치적결정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권위주의파는 민주주의의 절차를 양보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생존과 정치적 퇴로를 보장받는다. 귄위주의파는 일정한 거부권을 가지면서 민주화과정을 부분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는 앞의 동구권 사례와 다르게 “점잖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유형의 민주화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 내내 권위주의에서 이익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이 경우는 조기 사망가능성은 낮지만 장기적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하거나 민주주의에 대한 성과부족으로 인한 실망으로 인해서 체제자체가 질식하게 되는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설명요인은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떠했는가라는 ‘경로의존성’이 된다.

각주)-----------------
1) P. David, " Clio and the Economics of Qwerty", American Economic Review. 1985. pp.332-337, B. Arthur, "Competing Technologies, Increasing Returns, and Lock-in by Historical Events" Economic Journal, 1989. pp.116-131. 박영수, “경로의존성과 체제전환” 『산업경제연구』(산업경제연구학회, 2006) 제 19권 제 1호, pp.27-2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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