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영화 ‘명량’을 보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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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영화 ‘명량’을 보고나서
  • 신희섭
  • 승인 2014.08.0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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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근 가장 뜨거운 영화가 이순신 장군을 다룬 ‘명량’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14년 8월 6일 오후 2시에 관객 수가 700만을 넘어 섰다고 한다. 개봉 8일 만에 700만을 넘으면서 한국영화의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워낙 빠른 속도로 관객을 빨아들이고 있는 영화라 개인적으로 도대체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몇 몇 마니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많은 이들을 끌어 모은 다는 것은 영화를 넘어서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명량에 이토록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인가?

처음으로 야간 상영을 보았다. 조용히 혼자 더운 여름밤을 걸어서 호젓하게 영화표를 구매하고 들어간 영화관에는 자정이 지난 시간인데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인기가 있는 영화는 맞는 듯 했다.

제법 긴 예고가 끝이 나고 나서 시작한 영화는 2시간이 조금 넘겨서 자막이 올라갔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를 보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고 후반부에는 속도감 있게 영화를 즐기고 나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영화자체가 가진 재미는 감독의 전작이었던 ‘최종병기 활’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자체만의 요소가 이토록 많이 이들이 영화관을 찾게 할 만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역사적인 부분 몇 가지를 다소 왜곡했지만 드라마틱한 영화적 구성과 해석은 무난한 편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힘을 불어넣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감독은 영화에 몇 가지 이야기를 가미해 넣었고 이것을 통해서 단지 전쟁신이 많은 영화가 아닌 공포와 분노와 무력함을 느끼는 인간 이순신과 다른 장군들과 백성들인 인간들을 보여주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몇 가지 작은 일화들을 집어넣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흡인력도 충분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더욱 궁금하게 된 것은 “왜 명량이라는 영화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일까?”가 아니라 “왜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자가 이렇게 빠르게 증가하는가?”였다. 무엇이 속도를 부추기며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가게 밀어붙이는 것 일까하는 궁금증은 영화를 보기 전 보다 커졌다. 이 질문은 영화가 엉망인데 이 영화를 왜 이렇게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로 사람들이 찾아보는 것인가가 아니라 8일 만에 한 영화에 이렇게 집중하게 만드는 어떤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사회현상의 ‘왜(why?)’를 찾아야 하는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곰곰이 이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먼저 사안을 분석하기 전에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인을 설명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사실(fact)의 기술이다. '명량'은 개봉일인 7월 30일에 역대 최고 오프닝 스코어인 68만 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일요일이었던 8월 3일에는 한국 영화사상 최고 일일 스코어인 125만 명을 기록했다. 다음 날인 4일에는 월요일임에도 최고 평일 스코어인 98만 명을 기록했다. 이런 기록은 명량이 개봉한 시기가 방학이라는 것과도 맞물려 있고 휴가의 최정점기라는 점을 감안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도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극장으로 모으고 있다. 방학과 휴가라고 해서 사람들이 명량을 찾는 것은 아니다. 명량에 밀려서 흥행이 저조한 영화들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까? 어떤 뉴스 매체는 명량의 성과이면에 존재하는 거대 자본으로서 배급사에 주목한다. 명량은 CJ가 배급사인데 거대 자본인 재벌이 스크린을 쥐고 있으면서 막대한 물량공세로 광고를 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일찍 개봉한 영화 ‘군도’도 쇼박스라는 거대 배급사가 한다는 점에서 단지 배급사의 광고만으로 속도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몰려드는 다른 요인으로 문화적 측면이 지적될 수 있다. 최근 한국 영화를 보면 거대 자본이 투자를 하고 광고를 하면서 1000만이 넘는 영화들이 점차 늘고 있다. 천만까지는 안 되도 몇 백만의 관객을 끌어들이는 영화들도 제법 된다. 천만 명이 드는 영화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는 이런 현상은 사람들의 쏠림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천만을 만들어내려는 대중들의 힘과 여론 형성과 미디어의 부추기기 등이 관객들을 끌어 모으는 데 일조 한다. 개인과 기업들은 블로그나 인터넷 정보 등을 이용해서 특정문화나 상품에 대한 선호도를 강화하여 집단적인 쏠림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것은 맛 집에 집중하는 것과 유사하다. 마치 속초에 가서 ‘만석 닭강정’을 사기 위해 1시간에서 2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맛 차이가 크지 않은 주변 닭 강정은 거들떠보지 않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라는 것이 무턱대고 사람들의 선호를 조작해가면서 사람들을 몰아넣을 수는 없다. 영화에는 개인들의 취향과 선호가 강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쏠리는 현상이 있다고 사람들이 레밍 떼들처럼 무작정 따르는 ‘레밍효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영화를 보는 사람을 그저 수동적이고 의식이 없는 객체로 묘사하는 것은 실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왜곡한다.

물론 최근 영화관객들이 영화를 한 번만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주변사람들과 여러 차례 같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영화 ‘늑대소년’은 제작사가 이벤트로 1달간 가장 많이 본 관객에게 선물을 했는데 60번 이상 본 분이 1등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차례를 보면서 관객 수를 증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주변 사람들을 같이 끌어들이면서 자신도 여러 차례 영화를 보기 때문에 영화관객수가 실제 그 영화를 좋아하는 전체 인구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명량이라는 영화를 흡수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럼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은 사람들의 요구 혹은 수요(demand)라고 본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찾고 싶은 것이 있고 이 영화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서 찾고 만족하고 즐기고 싶은 것은 바로 이순신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보여주는 리더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리더십을 보여주는 방식보다 사람들이 리더십을 갈구한다는 점이다. 즉 영화를 제작한 측(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공급측)에서 제시한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이 얼마나 극적으로 묘사되었는지도 중요하지만 이 보다는 사람들이 갈구했던 것이 리더십이라는 점이 더 중요했다고 본다.

최근 한국은 많은 시련을 경험하면서 고통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 수많은 안전사고들과 병영에서 개만도 못한 폭행을 당해가며 죽어간 사건들이 있다. 이 곳 저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관피아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저질러 왔는지를 보았다. 새로운 국정운영을 위해 총리와 장관을 지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았고 대통령만을 바라보고 급박한 상황을 버텨내는 행정부처의 운영도 보았다. 새로운 정치를 표방했지만 지방선거에서 구태에서 벋어나지 못한 야당을 보았다. 세계경제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경제적 양극화는 일상생활 속에서 체념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와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걱정 뿐 아니라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댈 곳이 없다. 어린 시절 힘들 때 찾고 달려들고픈 어머니의 품 같은 기댈 곳이 없고 기댈 사람이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공동체를 잘 끌고 나갈 지를 같이 고민하고 뜻을 따르고 싶은 리더가 안 보인다.

리더가 안 보인다고 리더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체념할 수는 없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리더의 상을 기대하고 이것을 표현하며 이런 지도자를 찾고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자리에 이순신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다시 영화를 계기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 바쁜 이 시대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결전을 독려하는 그래서 좋은 결과를 만들고 그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사람들은 열광하는 것이다.

리더십이론의 대가인 번즈(James MacGregor Burns)는 추종자의 이익과 공포를 이용하는 ‘거래적(transactional)리더십’과 구분되는 추종자의 대의와 도덕적 고양을 불러일으키는 지도력을 ‘변혁적(transformational)리더십’으로 개념화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추종자는 단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성숙하기를 원하는데 이때 도덕적 고양과 이상실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리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명량’은 한국 사회가 더 높은 도덕적 고양과 이상의 실현을 원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해줄 지도자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건강한 신호이면서 현실에 대한 냉엄한 비판으로 보인다. 이순신장군이 몇 척으로 싸웠는가나 얼마나 많은 일본인을 물리쳤는가가 아닌 어디로 추종자들을 이끌 수 있었는가에 초점을 두고 본다면 영화 명량은 영화적 값어치 이상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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