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삼한 시대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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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삼한 시대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살았을까
  • 오태진
  • 승인 2014.07.23 14:4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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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3한 특집, 그 마무리 회차이다. 이번 회는 삼한(三韓)에 대한 세 번째 시간으로 실제 사회 구조와 취락 구조 등을 남겨져 있는 기록을 통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1. 읍락(邑落)으로 이루어진 사회

삼국지에 의하면 마한에는 50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등 삼한에는 총 74여개의 국들이 있었으며 그 국은 또한 읍락(邑落)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읍락’이라는 말의 쓰임은 고구려,부여,옥저,읍루,예,삼한 등에 두루 보이고 있어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똑같이 읍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어도, 각 나라의 읍락은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옥저와 읍루의 읍락에는 ‘장수’‘거수’‘대인’이라는 우두머리가 독자적으로 자기 읍락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들 나라에 ‘대군장’이나 ‘대군왕’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보아도 각각의 읍락들이 개별적인 정치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한에서는 여러 읍락 가운데 중심 읍락, 즉 지금으로 따지자면 수도(首都)격인, 국읍에 ‘주수(主帥)’나 ‘거수(渠帥)’가 있어, 국읍 주변에 있는 읍락들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국읍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그 국(國)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정치 세력의 크기와 영향력 정도의 차이에 따라 큰 자는 ‘신지’, 작은 자는 ‘읍차’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이처럼 삼한의 읍락은 국(국읍)의 지배자에게 제어되는 산하집단으로, 옥저나 읍루에서처럼 독자적으로 자기 지역을 다스리는 정치 세력이 아니었다.

2. 특별 구역 ‘소도’는 ‘국읍’에 포함되어 있었다

삼한의 74여개의 국에는 일반적인 읍락 이외에 ‘소도(蘇塗)’라고 불리는 ‘별읍’이 따로 있었다. 이 소도에서는 국읍의 ‘천군(天君)’이 주관하는 천신에 대한 제사와, 별도의 무당들이 지내는 토착적인 귀신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 별읍은 신앙적으로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국읍의 지배세력에게 묶여 있는 이중적인 성격의 사회였다 문창로, 2000는 주장도 있다. 즉, 별읍도 일반 읍락과 마찬가지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 국읍의 통제를 받으며 그 영역 안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별읍인 소도는 삼한의 74여개의 국을 각각 하나로 뭉치게 하는 정신적 일체감과 결속력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과 약간 다른 주장이기도 하다.

어쨌든 삼한에서 정치세력단위는 읍락이 아니라 국읍을 중심으로 한 ‘국’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삼한에서의 ‘국읍’은 잉여생산물의 재분배와 보관 등을 위한 경제적 기능, 외부 세력과의 전쟁과 방어를 위한 군사적 기능, 다수의 읍락들을 결집시키는 천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단위 정치체(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3. 지금으로 치면 ‘국읍’은 10km~30km 범위의 군(郡) 단위!

삼한 각국의 인구는 대체로 약 1만 여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현재 행정 구역 단위로 보자면, ‘군(郡)’ 정도였던 것 같다. 정치 발전 단계는 준(準) 국가 단계인 ‘군장사회(chiefdom)’로 이해된다.
 
‘군장사회’는 다른 말로 ‘성곽국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마한에는 성곽이 없다’라고 쓰여진 삼국지의 기록에 따라 이를 적용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최근 고고학계에서는 삼한의 국의 크기를 놓고, 직경 10킬로미터 정도의 ‘지구(地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구’ 규모는 읍락이고 수 개의 읍락을 포괄한 30킬로미터 정도의 ‘지역(地域)’ 규모를 국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삼국지에 의하면 삼한의 각 국은 몇 개의 읍락, 즉 취락단위로 구성된 것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국 내부에 몇 개의 지구(읍락) 구분이 있었다고 보는 후자의 견해가 더 사료에 부합한다고 판단된다. 직경 10킬로미터 정도의 규모는 ‘읍락’의 일반적인 크기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한의 국 가운데에는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지구’ 규모의 국도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삼국지에서 삼한에 ‘대국’과 ‘소국’이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마한의 대국의 규모는 ‘1만 여가’ 소국은 ‘수천 가’, 진󰋯변한에서는 대국이 ‘4천~5천 가’, 소국이 ‘6백~7백 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대국과 소국의 인구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보아 이들 국을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한 정치 발전 단계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4. ‘국읍’은 주, 현 혹은 군 단위로 재편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경주 중심의 초기 신라(사로국)가 확대되면서 진한 지역의 여러 국을 복속하는데, 안강 근처의 음즙벌국은 하나의 ‘현(懸)’ 단위로 편제하는 반면 상주의 사벌국은 ‘군(郡)’ 단위로 편제하여 규모의 차등이 있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국과 소국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한의 대국도 처음에는 소국으로 출발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삼한의 소국이 대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본기에서 십신(十臣)을 중심으로 형성된 위례지역의 ‘십제(十濟)’가 미추홀(인천) 지역의 비류 세력을 흡수하면서 ‘백제(百濟)’로 발전하는 과정이나 신라본기에서 경주 중심의 ‘사로국’이 주변의 이서국(청도), 음즙벌국(안강), 실직국(삼척), 압독국(경산) 등을 차례로 복속하는 과정은 소국이 대국으로 발전하는 예인 것이다.

이상 삼한에 대하여 3주 정도 지면을 통하여 자세하게 알아보았다. 삼한에 대한 특집은 이번 회차가 끝이다. 다음 주부터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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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 2014-08-04 21:28:31
잘 읽고 갑니다. 다음주도 기대합니다^^

seo 2014-08-04 21:28:31
잘 읽고 갑니다. 다음주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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