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저 인터뷰] 소년원 출신 노무사, 짧은 가방끈 불구 이뤄낸 ‘땀과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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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저 인터뷰] 소년원 출신 노무사, 짧은 가방끈 불구 이뤄낸 ‘땀과 실력’
  • 이아름 기자
  • 승인 2014.06.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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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소년원 출신 구건서 노무사. 그가 합격한 제2회 노무사시험은 총 6000여명이 지원했고 최종합격자 명단엔 고작 24명만이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시험이었다. ‘초졸’이라는 최종학력에도 불구하고 땀과 실력으로 정면 돌파해 이뤄낸 성과였다. 노무사가 된 후 단 한 번도, 해고와 관련해서 사측을 대리한 적이 없는 그. 지금은 노동법부터 개개인들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강의자로 명성을 더해하고 있다. 

 

 

가난 싫어 가출...결국 소년원행 

1950~60년대의 가난이란 지금의 가난과 질이 달랐다. 끼니를 거르는 것은 다반사였고, 학교를 다니고 싶지만 학비가 없어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16살 소년에게 계속되는 학비 독촉은 견디기 힘들고 참기 힘든 현실이었다. 결국 가난이 싫어 돈을 많이 벌어 보겠다며 가출을 단행했지만, 그 앞에 펼쳐진 현실은 더욱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배가 고파 남의 물건에 손을 댔고, 그 죄의 대가는 세상과 격리된 소년원 행이었다. 소년원을 나와서도 생활은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말 그대로 밑바닥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온 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소년원을 다녀온 후 10년 동안 막노동, 목장의 일꾼, 포장마차, 엿 장사, 고물장사, 외판원 등등 몸으로 때워서 할 수 있는 것은 안 해 본거 없이 다 해봤을 정도였다.

25살 결혼을 하면서 안정적인 돈 벌이 수단이 필요했고, 택시 면허를 따서 운전을 시작한 것이 한 해 뒤부터였다.

당시 민주화의 물결 속에 택시기사로 일하던 박종만씨가 분신자살을 하면서 노동자의 권리에 눈을 뜨게 됐다. 당시는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 시대였고 사측에서도 노동자의 권리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사그라져 가던 마음 속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보니, 노동법을 알아야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월차, 연차 휴가, 규율 등 관련 조항들이 관심을 끌었다.

독학으로 익힌 노동법이었지만 충분히 사측을 견제할 만큼의 위력을 발휘했다. 택시회사측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겠지만, 그동안 노동자들이 몰라서 누리지 못했던 권리를 사측에 당당히 요구해 쟁취해 나갔다.


6천명 중 24명 합격, 그 안에 ‘초졸’이?

1986년 국내 최초로 노무사 제도가 도입됐다. 당시 구건서 노무사의 나이 30살이었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어 노동법을 공부해야만 했고, 그렇게 접한 노동법이 재밌게 다가왔다. 노동법을 공부하던 중 노무사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노무사 제도, 나를 위한 제도가 도입됐구나!”

기본학력이 부족해도 노동법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했으니까, 도전해 볼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1회 시험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1회를 치르고 나니 3년간은 시험이 없었다. 1989년도에 다시 열린 2회 시험에서 그는 최종 합격하게 된다.

무려 6천명이 몰렸고 최종 합격자 명단에는 24명만이 이름을 올릴 수가 있었다. 그래도 1회 때는 250명을 뽑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이다.

그가 기억하기로 노무사 1차시험은 노동법1, 2와 국민윤리 등 총 4과목이었고, 2차시험도 노동법 1, 2와 민사노무관리, 경영조직논리 등 4과목으로 구성됐다.

합격 후 노동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최종합격자에 한해 최종학력 증명서를 요구했는데, 적어도 학사, 아니면 석‧박사 출신인 합격자들 사이에 ‘초졸자’가 등장해 관계자들이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초졸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하더군요. 하하”

 
초등학교 졸업자가 시험에 합격할 만한 난이도가 아니라고 당시 노동부 관계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구건서 합격자가 실제 초등학교 졸업자가 맞는지 확인, 또 확인, 택시기사로 근무했는지 등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부정행위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차시험 고사장에는 30명이 입실해 시험을 치르다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3명 중 그가 속해 있었다. 시험 자체가 너무 어려워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절박하면 뭔가를 찾아낸다. 인생을 바꾸고 싶었고, 내 인생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악착같이 하자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버텼을까 할 정도 철저하게 버텼다”

당시 구건서 노무사의 상황은 공부만 하는 사람들에 비해 공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생업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일과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다. 2차시험은 이해를 바탕으로 체계를 수립해 자신의 논리로 주장해야 하는 시험이다.

택시기사 일을 줄이고 공부하는 시간을 확보했다. 토, 일요일에는 노무사 시험 학원강의를 수강했다. 주중에 일을 하면서 손님을 기다리거나 신호등에 걸렸을 때 등의 조각 시간까지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 그의 핸들에는 오려진 법전과 책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택시 오디오에서는 하루 종일 강의 테이프가 흘러나왔다. 방송대 강의 테이프를 노래 듣듯이 하루 10개씩 꼬박 들었다. 그렇게 하니 책을 안 봐도 내용을 익힐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어떤 책은 100번 정도 본 적이 있고, 테이프도 100번 정도 듣고 나니, 테이프가 끊어지거나 늘어나 이어 붙여서 듣고, 그러다 재생 불능 상태가 되면 새로 사서 듣고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법전만 공부 했지만, 어렵더라도 100% 한문으로 돼 있는 대학교 교재들을 모두 섭렵해 나갔다.

25살에 결혼해 애도 있었고, 안정된 수입원이 필요해 택시운전을 했던 구건서 노무사.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인생을 바꾸기 위해 노동운동을 했다.

그는 아직도 노무사 합격 소식을 접했을 때가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함께 고생하던 집사람과 참 많이 울었다고 하는 구건서 노무사. 몇 년 동안 목숨을 걸만큼 집중했던 것이 마무리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젊음이 있고, 절박한 심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정상적으로 공부를 했고,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려운 환경을 바꿔 보고 싶었고, 희망을 가지고 싶었기에 가능했던 꿈의 실현이었다.


소년원 아이들 돕고파 사법시험 도전

구건서 노무사는 노무사시험에 합격 한 후, 노동연수원에서 연수 6개월을 받고 바로 개업을 했다. 당시 마음 맞았던 노무사 3명과 함께 동업을 했다.

사무실은 바로 반열에 올라섰고 잘 돼가던 시점에 계속 사무실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사법시험을 준비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노무사 시험에 합격해 사무실도 잘 돼 가는 시점에 갑자기 사법시험 도전이라니! 위험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보다는 소년원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과거의 자신처럼 현재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돕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변호사 자격이 필요했다.
 

 
“상담이야 제가 할 수 있지만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변호사가 돼야 했기에 사법시험에 도전했던 것이죠”

이미 서른 중반을 넘어가던 때였지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해 보자는 결심을 굳혔다. 노무사 시험 때처럼 전념을 다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무사시험 보다 사법시험의 수험량은 3배 정도가 많았고 어학이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초졸 출신의 한계를 뛰어 넘었던 그지만 기본기가 없어 어학에 투자해야 했던 시간이 생각보다 더 커졌다. 영어를 하다가 일어로 선회했지만 일어도 처음에는 쉽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2년간 사무실을 접고 공부했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이후 94년부터는 노무사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해고, 산재, 자문회사 등의 사건을 맡아 하면서 안정시켜 가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년간 재도전했지만 8과목씩이나 되는 시험을 치르자니 그는 점점 한계를 절감하게 됐다.

비록 사법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4년간 법학공부를 한 덕분에 독학사, 석, 박사과정을 큰 힘 들이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날치기 된 노동법 덕분?

1996년도 12월 26일 노동법 날치기 파동이 발생했다. 본회의장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기존의 근로기준법 조문을 일부 수정 정도가 아닌 전면 개편한 것이다.

“옛 법을 폐기하고 새 법을 개정”

구건서 노무사는 이날부터 꼬박 14일 낮과 밤을 지새가며 다음 해 1월 14일에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 관한 책을 펴냈다. 그때는 입법안 공개가 안 됐기에 기자들이 입법안을 복사한 것을 가져오면 정리, 해설하면서 무려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완성했다.

책을 펴낸 3일 후 1월 17일 여당과 야당이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을 재개정한다는 합의를 한 것. 재개정한다고 하니 책을 다시 수거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책이 안 팔리기는커녕, 오히려 단체 주문으로 이어졌다. 현장에서는 재개정 되더라도 조항 몇 개 정도만 바뀐다고 생각해 책을 그대로 주문하고 있었던 것.

실제로 3월 14일 여야 합의에 따라 이뤄진 재개정에서 정리해고 법제, 타임오프 등에 관한 몇 개의 조항만 바뀌었다. 50페이지 정도 내용을 수정해 3일 만에 책을 재 발간했고, 며칠 만에 재판, 삼판 행렬이 이어졌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국회에서 통과된 대조표를 받아 볼 때 해설서를 내 준 것이니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해 5월까지 독점했고, 그 후에는 더 내용이 충실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건서 노무사의 책은 선점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개개인의 인생설계에 뛰어들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노동법이 전면 개정이 되니까 기업에서 새롭게 개정된 법을 익힐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기왕이면 저자인 강사를 선호했고, 구건서 노무사에게 강의가 몰리기 시작했다. 오전 조찬, 점심, 저녁 등 하루 4군데도 돌아다니곤 했고, 심지어 대기업들에서 그를 서로 강사로 부르기 위해 헬기까지 대절해 놓고 기다릴 정도였다.

책 한 권을 선점한 것이 강의자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강의를 많이 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연결되고 있다.

그의 강연 주제는 노동법에 대한 기본이론에서 시작해서 임금제도 수립, 컨설팅 등에 관해 경영자에게 인사노무관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신나게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등의 주제로까지 이어진다.

그의 강의 기본철학은 단순한 지식전달자로 그치지 말자이다. 강의를 통해 자신 스스로 철학을 정립하고,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강단에 선다.

“개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면 남 탓 할 필요 없이 자신의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은 인생과 연결돼 영향을 미친다. 그는 사람에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리더십에 관심이 컸고 직접 리더십을 대체할 ‘네비게이터십’이란 자신만의 용어를 만들어 개인의 인생설계에 관해서까지 강의한다.

실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보여 주는 모습과 그의 철학과 사상을 담아 실천해 나가는 현재 진행형의 모습들 속에서 본인들의 삶을 뒤돌아보고, 개선해야 겠다는 마음을 심어 준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로부터 ‘롤모델이다’, ‘배우고 싶다’ 등의 내용이 담긴 감사 이메일을 상당히 받는다. 무심히 잊고 살 수 있지만 인생을 다시 고민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지금의 하루가 20년 후에 나를 만든다

그는 노무사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이지 돈 벌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강의를 하거나 컨설팅을 할 때도 떳떳하게 임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몸소 실천하기에 구건서 노무사는 사람을 다룬다는 입장에서 노무사와 변호사는 적어도 돈 벌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노무사는 노동을, 변호사는 인격을 다루는 만큼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업무에 임해야 한다는 자기 철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의미 없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정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천민자본주의로 치부되는 것들과 멀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인간과 인간, 나아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골프 안치고, 고급차, 외제차는 단 한 번도 타지 않았다. 흔한 명품 하나도 없고, 신발이며 옷가지도 소박한 물건들만 찾는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썼으며 (24권의 저서가 있다), 소년원 등에 무료 특강을 많이 나간다. 이뿐만 아니라 2만여주의 나무를 심었고, 농사도 4천평 정도를 직접 짓고 있다.

화물차나 승합차를 타고 다니니 대기업 강의에 나설 때, 출입문에서 그를 막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나지만 소박한 차림새를 포기할 마음은 없다.

구건서 노무사는 “폼 잡는 기여가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고 기여하고, 스스로 인생설계도를 그려 보라”며 “스스로 고민하지 않으면 결론을 내리기 힘든 것”이라고 조언했다.

노무사나 변호사 등 자격시험을 목표로 임하고 있는 수험생들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단지 시험은 인생의 과정에서 중간과정일 뿐, 자신이 합격 후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

그가 공부할 때는 노무사가 되면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와 줄 것이라고 마음먹었고, 근로자를 해고하는 것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사용자 측(회사측)을 대리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생계가 달려있는 문제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했던 초심 때문에 회사 편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물론, 회사 쪽에서 의뢰가 많이 들어오지만 양심에 꺼리는 것은 안 하려고 했다.

“다행히 저는 사건을 안 해도 강의료가 들어오기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죠. 일반 노무사들은 사건을 안 하면 수입이 없으니까...그래도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죠”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몰입해서 공부를 하되, 시험 합격 후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 시험은 분명 어렵고 고된 과정일 수밖에 없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격시험의 합격 인원은 점차 많아지고, 결국 늘어난 인원끼리의 경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현재 선배들이 진입하지 않았던 영역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기존 시장은 진입장벽이 워낙 견고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가를 낮출 수밖에 없는데 이는 질적 저하 등 하향평준화가 돼 버릴 뿐이라고 조언했다.

젊기에, 아직은 기회가 많기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장거리 마라톤처럼, 5~10년 후를 생각해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하루를 살아야 한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 보면 자신의 인생 루트가 완성될 것이다.

이아름 기자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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