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듣기와 인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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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듣기와 인내심
  • 임성근
  • 승인 2014.05.1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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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

필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무실에서도 늘 음악을 틀어놓고 일하곤 한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침에 밝고 경쾌한 행진곡 풍의 노래를 들으면서 하루를 즐겁고 명랑하게 시작한다. 나른한 오후에는 아다지오 풍의 느린 음악을 들으면서 느긋하게 하루 일과를 마무리해 간다. 비오는 밤이면 끈적이는 듯한 색소폰 소리가 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차(‘곡차’라면 더욱 좋다) 한 잔 하고 싶어진다. 이렇듯 늘 내가 좋아하고 듣고 싶은 소리만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또 늘 나에게 좋은 소리를 해 주고,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음악이나 기쁜 소식을 듣는 데에는 아무런 인내심이 필요 없다. 그냥 듣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아름다운 음악이나 좋은 소리만 귓가에 들리는 것이 아니다. 귀에 거슬리는 충고를 듣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또 괴롭고 슬픈 뉴스를 듣고 울적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면 차라리 나에게 청각기능이 없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나라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중국에는 당태종 이세민이 있다고 한다. 당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통해 황제가 되었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당태종이 그러한 평가를 받는 군주가 된 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당태종이 신하로부터 간언(諫言)을 듣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당태종은 현명한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으려 했는데, 특히 위징(魏徵)은 그에게 거침없이 간언을 했다고 한다. 오죽이나 당태종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으면 당태종이 황후에게 “그놈을 죽여 버릴까? 날마다 나를 욕보이는데 말이야”라는 말까지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까?

중국 요순시대 우(禹) 임금은 자신에게 누군가 좋은 말로 충고해 주면 그에게 절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善言則拜).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도 자신의 잘못을 남이 지적해 주면 기뻐하며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공자는“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하는 데 이롭다.”(良藥苦口利於病, 忠言逆耳利於行)라고 하셨다. 이렇듯 훌륭한 위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충고해 주는 사람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 하면서 그 충고를 귀담아 들었다. 남의 충고를 듣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대개 자신에게 충고해 주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오죽했으면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가 “요구받기 전에는 충고하지 말라.”고 했을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녀들이나 후배들에게 충고, 아니 잔소리를 할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는 듯하다. 심지어 친구, 동료나 선배에게도 용감하게, 아니 무모하게 충고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신의 충고를 듣는 사람이 과연 기껍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은 채 충고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그렇다.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는 충고는 오히려 자신에게 독화살이 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뿐이다. 충고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혹시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비단 충고가 아니라 남이 하는 일상적인 말이라 하더라도 이를 인내심을 가지고 잘 듣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할수록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남에게 자신의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한다. 남이 하는 말을 끝까지 참고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법관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에서 “송사를 ‘듣는’ 것의 근본은 성의를 다하는 데에 있다.”(聽訟之本 在於誠意)고 갈파하셨듯이 법관이 당사자의 말을 성의 있게 잘 들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어찌 생각하면 법관은 남의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직업인 사람이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얼마나 참을성 있게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신뢰도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인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고 한 명언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24년 전 결혼할 때 선친의 친구분께서 “百忍萬和”라는 서예작품을 나에게 선물해서 지금까지 거실에 걸어 두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서예작품인가보다 생각하고 걸어 두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필자의 성격을 안 그분께서 늘 가슴 속에 새겨 두라는 의미에서 보내 주신 듯하다. 그분은 이름난 서예가도 아니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잘 쓴 글씨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24년여 동안 우리 집 거실에 걸어두다 보니 이젠 자연스레 가훈(家訓)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필자는 위 서예작품을 볼 때마다 급한 성격을 죽이고 참을성 있게 남의 말을 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참는다는 것, 듣는다는 것, 그리고 남의 말을 잘 참고 듣는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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