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저 인터뷰] 육사 전체 수석, 사법시험 합격한 법무관 방위사업청 강유미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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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저 인터뷰] 육사 전체 수석, 사법시험 합격한 법무관 방위사업청 강유미 소령
  • 이아름 기자
  • 승인 2014.05.01 19:03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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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 육사생도, 남녀 차별과 마주하다

1998년 처음 여성에게도 문을 연 육군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 방위사업청 법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강유미 소령. 전형적인 군인가족 출신인 그녀는 1997년 육사와, 경찰대에 모두 합격한 인재이다.

첫 여자생도를 향한 선배들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했다. 거수경례를 해도 여생도의 인사는 받지 않았다. 여자는 후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여생도를 받아들이기 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90%이상이 여생도 입학을 반대했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성도 받기 힘든 훈련과 조직생활에 여자가 끼어든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조차 힘들었던 정서가 있었다.

생도시절, 생도로 인정받는 것부터가 뛰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존재했다. 졸업하면 괜찮아 질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2002년 차석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소대장으로 첫 야전부대에 배치됐다. 그동안 여성이 배치된 곳은 신병교육 소대장 정도였지만, 야전부대로 배치된 것은 강유미 소령이 처음이었다.

강 소령이 배치된 부대는 6.25전쟁 이전부터 있던 곳으로 역사가 깊었다. 훈련도 많아 병사들과 유격훈련, 50~60km에 달하는 야간 행군을, 그리고 야전에서 텐트치고 밤을 보내야했다.

당시 강 소령이 이끌던 병사들은 30명 정도로 모두 징집된 의무병사들이었다. 강 소령보다 체력면에서 좋을지 모르겠지만 열의는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소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를 짊어진 강 소령는 뒤처지는 단 한명의 병사도 없이 야간 행군을 마쳤다.

 
병사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의무고,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징계가 따른다. 그런데 오히려 낙오된 병사 없이 행군을 했다고 자신에게 칭찬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여자치고, 여자니까 잘했다?’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고도 칭찬을 받는다’는 것…….여자로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는 군 조직 속에서 여자인 강 소령에 대한 기준치 자체가 낮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덜 간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딸만 3명인 집안에 여중, 여고를 나오다 보니, 남녀 차별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남녀차별적인 갈등 요소에 아예 노출된 적이 없다 보니 이 생각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평하게 인정받고 싶어 ‘사시’ 도전

“공평하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에서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됐다”

강유미 소령은 공평하게 평가 받을 수 있는 잣대는 시험을 통하는 것이라 여겼다. ‘여자치고, 여자니까 잘했다’라는 말 대신, 공평하게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 사법고시 합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강 소령은 이 사법시험에 도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부담이 큰지를 몰랐다. 당시엔 사법시험 합격자 1천명 시대이니 그저 열심히만 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을 그대로 믿었다.

사회에서 다양한 전문가들이 활동을 하듯이 육군에서도 군복을 입고 다양한 직역의 전문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육군에서는 위탁교육제도를 운영해 해마다 군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인재를 육성한다.

“군의관, 법무관, 군사외교전문가, 조리 전문 분야, 군악대 등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전문 분야가 군부대에 있다”

위탁생을 선발할 때도 영어성적과 성실한 군 복무자세, 대학교 성적 등을 기준으로 경쟁을 통해 선발하게 된다. 위탁생으로 선발됐다고 해서 바로 교육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해당 학교에 학사편입시험을 치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강 소령 역시 학사편입시험을 거쳐야 했다.

이때가 2005년 27살이었다. 법학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사법시험이 뭔지도 잘 모르고 법대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의 성적은 군 생활 평점이 되기 때문에 여간 부담이 큰 것이 아니었다. 학점은 학점대로 챙기랴, 사법시험도 준비하랴 무던히도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여기서 실패하면 군인으로서의 커리어에도 낙인이 찍힌다”

강 소령은 정말 1년이면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열심히 1년간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봤지만 결과는 점수가 너무 안 좋아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실패를 하면 군인으로서의 커리어에도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녀를 더 두렵게 만든 것은 앞으로 1년을 더 공부를 한다고 해도 합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회의감이었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 할 수 밖에 없어 다시금 힘을 냈다.

2년이 지나고 나서 사법시험이 왜 체력전이라고 부르는지 몸소 체험하게 됐다.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왜 저렇게 헬스장을 다니고 운동을 하는지 그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공부한지 2년이 지나고 나니까 공부를 할 수 있는 토대가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일주일에 3번 정도는 헬스장 런닝머신 위에서 30분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 하지 않았다. 시험공부를 하던 때가 지금은 기억이 가물 하지만 아침 7시부터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학교 수업 듣고 다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보면 새벽 1~2시를 훌쩍 넘겼다.

당시 강 소령은 오늘의 오점을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한 시간만 더 공부했으면, 오늘 다른 곳을 가지 않았더라면 등과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강박관념에 가깝게 공부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

이해 않고 암기만…불합격의 연속
끼니 대충, 건강관리 안하니 끝내 폐렴

처음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할 때, 일단 외우고 보자는 식의 공부를 했던 것이 불합격의 큰 이유가 됐다. 계속 읽으면서 뭔지도 모르고 이해는커녕, 외우기기만 했더니 암기가 지속되는 시간도 짧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공부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또 욕심은 많아져서 모르는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자꾸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었다.

당시 강유미 소령은 2차 시험만 3번 봤다. 처음 1차 합격 후 2차에서 재시까지 떨어지고 인생에 있어서 좌절이란 것을 맛보기도 했다. 2차에서 총점은 높았지만 상법에서 과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정말 말 그대로 독하게 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불합격하니 그녀의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면 될 것이란 생각은 무참히 무너졌다. 떨어진 사람은 응당 이유가 있을 것이란 오만했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깨닫게 됐다.

“떨어졌던 그 때가 인생에서 약이 됐다”

 
자신의 불합격을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 해야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란 목표로 다시 수험공부에 전념했다. 재시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기에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강 소령이 2차 시험 때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냐면, 해당 범위를 공부하고 학원가서 시험을 보기 위해 점심 식사를 거르는 것은 다반사였다. 오전 8시부터 공부해서 2시경 시험을 치르고 나면 훌쩍 시간이 지나 저녁 5~6시가 되곤 했다. 그때서야 첫 끼니를 때우고 다시 공부하는 패턴이었다.

2차 시험을 50일쯤 남겨둔 어느 5월, 독서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이 추워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됐다. 병원에 갔더니 폐렴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군인으로서 건강과 체력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그였지만 대충 끼니를 때우고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했던 탓이었다.

지방에서 어머니가 올라와 그녀의 뒷바라지를 해 줬지만, 아픈 딸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오죽할까! 2차 재시에 불합격하고 부모님은 오히려 ‘괜찮다’, ‘건강만 잘 챙겨라’라고 다독였다.

강유미 법무관은 “수험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먼저 합격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합격하지 않아도 공부를 그만 둘 순간이 생긴다”며 “혼신의 힘을 다 뿌려 버리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털고 일어 설 수 있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시험의 성공이 꼭 수험의 성공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바랐다.

미련 때문에 계속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더 안 된다는 것. 최선을 다했기에 재시에서 떨어졌어도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됐다.

“공부할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도전한 것이지 시간이 없었다면 미련 없이 떠났을 것”

1차 시험에 합격 하니 다시 군으로 복귀하지 않고 대학원에 연계를 해 총 4년 정도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최초 1차 시험 합격은 2007년도에 했지만 재시에 실패하면서 2009년도에 1, 2차 모두 합격하게 됐다.

어떤 모습이든 딸이 원하는 길을 가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지지한 부모님. 간혹 자식의 성공이 마치 자신의 성공인양 생각하는 부모님들도 있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자식의 삶과 부모의 삶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합격 때도 ‘자식의 마음이 더 아픈 것’을 걱정했고, 합격 후에도 ‘이제 고생 안 해도 되겠구나’라며 안도했다. 그래서 합격에 대한 ‘부담’이 덜했던 것도 사실이다.
 

‘통일법’ 신선한 충격

강유미 법무관은 시간이 없었던 것이 합격의 비결이 됐다고 말했다. 2009년도까지밖에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불합격 한다고 해서 더 이상 시험을 볼 수 있는 여유 없이, 야전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1차 시험 합격 후 짧은 시간에 정리를 해서 2차 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핵심만 딱 보고 갔기 때문에 방대한 양을 줄여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전 해에 최선을 다 했던 것 역시, 바탕이 돼서 합격할 수 있었다.

힘들게 합격한 후 펼쳐진 사법연수원생활은 수험기간에 비해 행복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연수원 생활 성적으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들 치열한 경쟁을 힘겨워 하지만, 강 소령은 진로가 정해져 있어 다소 그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금도 직업이 뭐냐고 하면 군인이라고 말해요. 법조인이 먼저가 아니죠. 앞으로도 군 생활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죠”

연수원에서 공부해야할 분량도 방대했기에 기본적인 공부에 열중했고, 연수원 2년차 되던 12월엔 만삭으로 시험을 치렀다. 부담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녀는 연수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고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더 공부를 하고 싶은 것으로 단연 ‘통일법’을 꼽았다.

통일법 관련해서 강의를 듣는데, 그동안 군인으로서 적대국가, 위험요소로만 여겨왔던 북한에 대해 법률적인 문제로 바라보게 된 것. 법률적인 문제로 남북 주민들의 문제와 그들의 통치체제와 우리 체제를 법적으로 이해하는 문제 등 그동안의 인식에 반하는 통일법이라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골리앗 상대로 승소했을 때 기뻐!

강유미 법무관이 근무하고 있는 방위사업청은 군에서 필요로 하는 무기를 획득해 주는 업무를 담당한다. 국방예산의 대부분을 방위사업청에서 처리한다고 할 정도로, 무기를 구매하거나 연구개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들어간다. 따라서 법률적인 자문요소들도 상당하다. 방위사업청만 해도 변호사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 총 25명이 근무하고 있다.

무기를 거래하는 만큼 계약금 자체가 워낙 크다보니 소송이 벌어지면, 대형 소송으로 비화된다. 상대방 측에선 대형 로펌들과 손을 잡고 총공세에 나서는데, 전관출신 등의 변호사를 앞세운 대형로펌과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비견된다.

강 법무관은 “때론 역량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버겁기도 하고, 대한민국을 대리하기 때문에 승소하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해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국군 내 법무관의 필요성도 더 커졌다. 소송의 이유는 다양하다. 부정행위자에 대한 입찰 참가 제한이 부당하다며 일으키는 소송에서부터 제때 납품기간을 놓쳐 붙은 지체상금을 줄여달라는 소송, 낙찰자 선정에서 문제제기 등의 행정소송이 있다.

그리고 통상 군에서는 무기를 거래할 때 원가와 이윤율 등을 고려해 가격을 형성하는데, 무기체계에 관한 시장가격이 형성돼 있지 않다보니 일부 업체에서는 허위자료를 제출해 부당하게 과다 청구할 때는 민사소송으로 번진다. 내부적으로 처리가 어려울 경우에는 정부 법무공단에서 사건을 대리하기도 한다.

강유미 소령은 법무관으로 일 하면서 무기 관련 사업의 법률적인 검토를 통해 사업이 안정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큰 보람을 느낀다. 사업들의 규모가 큰 만큼 많은 이들이 고민이 녹아 있는 곳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총점 보다는 과락 없는 삶

혼자 일 때는 ‘강유미’의 이름으로 나만 잘 하면 되는 삶을 살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내로서, 며느리로, 엄마로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자신의 역할에 조화가 필요하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여성이라면 1인 3역을 어떻게 하면 잘 할지 고민하고 때론 이런 빡빡한 삶이 힘겨울 때가 있다.
 

 
강 법무관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공만을 쫓다보면 자신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며 “어느 정도 적정한 조화점,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회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주장만 펴고 ‘성공지향적’으로만 살아간다면 결국, 조화가 무너져 스스로 꺾이고 만다.

주변을 돌보고, 가정을 살피면서 가야지 멀리 갈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뭔가를 포기하는 것 같지만 훗날 가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강 법무관은 “그래도 예전보다 우리사회가 변화를 하고 있는 것 같다”며 “물론 제가 공직이라는 온실에 있어서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출산에 대한 배려 문화가 예전 보다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미혼일 때와 결혼을 하게 되면 분명 자신의 모습이 달라진다. 그리고 달라진 그 모습도 자신이다.

시험에서 합격을 결정하는 것은 높은 평점보다 어느 한 과목에서도 과락이 없어야 하듯, 인생도 똑같다. 총점이 아무리 높은들 어떤 한 구석에서 과락 있으면 큰 그림을 그려나갈 수가 없다.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

4살 딸아이와 조만간 태어날 아이의 엄마인 강유미 법무관, 엄마로서 아내로서는 사회에서의 강유미 보다 점수가 낮다고 스스로를 낮췄다. 완전히 소홀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해주려고 한다. 단, 가장 잘 하는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 지혜다.

대부분 아빠보다 엄마가 아이에게 쏟는 마음이 더 크기 마련이다. 이런 모성애가 사회적으로는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아이가 웃을 때는 엄마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엄마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딸아이가 가만히 와 엄마를 꼭 안아 주며 위로해 준다. 4살의 어린나이지만 공감능력만은 어른 못지않다.

강 법무관은 아이가 자라 군인이 된다면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전시를 대비해 교육과 훈련을 받지만 애국심과 정의로움을 나누는 조직이기 때문에 행복한 직업이라는 것!

이아름 기자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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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2019-11-17 11:07:53
진짜 대단하십니다...

정말 2018-07-06 01:39:05
정말 너무 멋지신분..

ㅇㅇ 2014-05-09 13:03:21
정말 멋있습니다!

이유미 2014-05-05 22:56:48
와 진짜 대단하다.

대왕게이 2014-05-04 17:24:22
누나 멋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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