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저 인터뷰]누구나 미국변호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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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저 인터뷰]누구나 미국변호사가 될 수 있다!
  • 이아름 기자
  • 승인 2014.04.2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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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미국변호사는 로스쿨생, 고시생, 대학생, 한국변호사, 직장인 등 누구나 미국변호사가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쉽게 미국변호사가 돼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아무런 정보가 없던 시절,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무작정 미국행을 선택해 우여곡절 끝에 LL.M과정을 우등졸업하고 미국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에겐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뜻하지 않았던 일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고, 한 때 꿈을 잃어 버렸던 암흑기가 존재한다. 미국변호사의 길을 안 순간, 다시금 일어 설 수 있는 꿈이 생겨났다.

미국변호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하루 한 끼만 먹고, 주중 8시간, 주말에는 16시간의 아르바이트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미국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률시장 개방 전, 무엇을 준비하겠는가?

한미 FTA가 발효돼 국내 법률시장이 서서히 개방되고 있고, 2017년이 되면 법률시장은 완전한 개방을 맞게 된다.

그동안 영미국가의 로펌들이 외국법자문사법률사무소 설립 인하를 획득하고 대표변호사는 외국법자문사의 자격을 승인받아 국내에서 국외법에 대한 자문을 수행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지금은 비록, 국내 변호사와 외국 변호사들의 업무 경쟁이 미미하겠지만 조만간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김기태 미국변호사는 법률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 한국의 변호사로서는 그 만큼 입지를 잃어버린다고 우려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걱정이다.

지금도 변호사의 ‘과잉’ 공급으로 많은 변호사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비단, 과잉 공급의 이유만은 아니지만, 최악의 경우 법률사무실을 접는 변호사들도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 해 수천 명의 변호사가 배출되면서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

불과 몇 해 전만해도 전문영역을 구축하고 나름의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일들이 ‘신 변호사의 상’처럼 여겨져 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예 ‘송무’에서 벗어난 영역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왔다.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김기태 미국변호사는 자기경쟁력 개발이 필요하며 미국변호사 자격증 취득이 또 하나의 블로오션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장 미국변호사가 한국에서 법률사무실로 개업하고자만 한다면 불가능은 없다. 한국변호사와 함께 어느 정도의 지분 관계를 형성해야 하지만, 개업 후엔 한국변호사를 고용해 법률사무실을 운영할 수도 있다.

또 법률시장이 개방되면 한국변호사도 반대로 미국에 고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김 변호사는 영어 실력을 키워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기존 송무시장의 포화, 매년 배출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변호사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겪어야만 한다. 물론, 외국으로 진출할 때도 이러한 경쟁은 필수다.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엔 한국 시장은 한계가 있기에 보다 큰 시장에서 판을 키울 필요가 있다. 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 국내에 다시 진입한다면, 이 또한 국내시장에서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누구나 미국변호사가 될 수 있다!

막연하게 반드시 미국변호사가 돼 돌아오겠다는 꿈 하나만을 간직한 채, 단돈 340만원을 들고 미국행비행기에 몸을 실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김 변호사.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출국 이틀 전에는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모든 걸 걸어야 했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꿈을 위해 버틴 지난 8년간의 미국생활. 그러나 막연한 꿈만 가지고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꿋꿋이 자신을 위로하며 미국변호사의 꿈을 달성한 이후 김 변호사는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보다 수월하게 그 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미국로스쿨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김 변호사는 Pre-Law과정과 미국변호사시험 과정을 4년여의 집필과정을 거쳐 ‘김기태 미국변호사의 미국변호사 누구나 되기 시리즈’로 출판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철저한 미국법의 이해를 통한 성공적인 미국로스쿨 생활과 미국변호사의 꿈을 실현해 주기위한 조력자로 강의에 나서고 있다.

 

현재 김 변호사가 운영하는 미국로스쿨아카데미 수강생의 80%가 직장인이다. 이는 살아남기 위해서 학위와 자격증 취득에 매달려야 하는 지금 한국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 회사원에서부터, 공무원, 교수, 변호사는 물론, 세무사, 노무사, 회계사, 법무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가진이들이 포진하고 있다.

특히 김 변호사는 국내 다양한 유사 법률직종군이 미국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을 때, 오는 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변리사, 노무사, 세무사 등 자신 영역 더욱 특화할 것”

소송대리권을 주장하는 변리사들이 언제 마무리 될지 모르는 해결을 기다리는 것 보다 직접 미국변호사 자격증을 따면 변호사의 자격으로 소송대리, 중재가 가능하다는 것. 또 노무사, 세무사 역시 자신의 특화된 영역이 있는데다 직접 소송대리인으로 나설 수 있는 미국변호사 자격의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 로스쿨출신 변호사 중에서 올해 1월 변호사시험을 보고, 미국변호사시험 준비에 나서 오는 7월 캘리포니아 주 바시험을 앞두고 있는 로스쿨 3기생, 변호사가 있다. 4월 합격자 발표가 나니 한국변호사로서, 미국로스쿨 과정을 따로 밟지 않고 캘리포니아주 바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

김 변호사는 “국내 로스쿨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6개월 동안 실무실습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미국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해 취직하면 지방대 로스쿨이라는 단점도 극복할 수 있다”며 “국제화, 전문화를 위해 만든 로스쿨의 취지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또한 ‘노장 고시생’에 대한 구제의 길도 열린다는 것. 오랜 시간 법학공부에 매진한 결과, 리걸마인드는 갖춰져 있을 것이고 한국의 사법제도에 대해 공부했기 때문에 미국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면, 한국소송도, 국제소송에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이 뿐만 아니라,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있는 대학생들도 의미 없는 스펙 쌓기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미국변호사 자격에 매진한다면 자신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는 이유는 소요되는 금전적인 것과 시간을 줄이면서 확실한 자격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어학실력이 출중한 대학생들이 넘쳐난다. 토플점수만 좋아도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미국로스쿨을 갈 수가 있는 방법이 있다. 돈이 없어서 못 간다는 변명은 김 변호사에게 통하지 않는다.

김 변호사는 “인지도는 낮지만, 전액장학금으로 갈 수 있는 미국로스쿨도 얼마든지 있다”며 “로스쿨 학기는 9월초에 시작해 다음해 5월 초, 중순에 끝이 난다. 9개월간 로스쿨을 다닌 후 열심히 한다면 6개월 만에 라이센스를 취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3년 JD정규코스와 1년 LL.M 특별코스가 있다. JD의 경우 국내 로스쿨 시험 LEET와 같이 LSAT라는 시험을 쳐야 한다. LL.M은 법학학사(사이버대학학위 포함)와 토플점수만 있으면 입학 할 수 있다.

LL.M의 장점은 1년이라는 단기간에 미국변호사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둘째, 석사이므로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다. 셋째, LL.M에서 JD과정으로 미국현지에서 편입이 가능하다. 넷째, LL.M에서 SJD 즉, 미국박사과정을 지원할 수 있다. 다섯째, 한국 로스쿨 지원시 영어점수가 면제되는 등의 이점이 있다.

이러한 정보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이 김 변호사의 마음이다.

한국변호사들의 미국변호사 거듭나기

앞서 말했듯이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한국변호사들도 자기경쟁력 개발에 적극나서야 할 때이다. 한국변호사는 미국로스쿨(JD/LL.M) 학위를 취득하지 않아도, 경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시험을 볼 수 있는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시험이 있다.

지난 2012년 3월 19일부터 한국변호사들이 김 변호사가 운영하는 미국로스쿨 아카데미에서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시험 준비 과정을 밟고 있다. 이는 서울지방변호사회와 업무협약으로 이뤄진 과정으로 지금은 총 180명의 한국변호사들이 미국변호사로 거듭나기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변호사가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시험을 볼 경우, General Bar Examination 시험에 응시해야 하며, 시험과목은 MBE과목 6과목과 Essay과목 7과목으로 총 13과목으로 구성돼 있다. 시험은 매년 2월과 7월 마지막 주 화, 수, 목요일에 치러지며, 직접 캘리포니아주에 가서 시험에 임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주 바 시험 가장 어렵고 합격률 낮아?”

주로 캘리포니아 바 시험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합격률이 낮다고 여기는 생각에 대해 김 변호사는 “시험 본 사람 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NY바시험과 CA바시험이 어렵다고들 한다”며 “NY바의 경우, 객관식 50문제가 있으며 Essay과목이 12과목으로 상당히 부담스러운 반면, CA바 시험은 객관식 시험이 없으며 Essay과목이 7과목에 지나지 않아 NY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 한 편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PT는 단지 지시사항에 따라 요약 정리하는 시험이므로 소송을 진행하는 한국변호사들에게 부담이 적을 것이며 Essay과목 또한, 짧은 시간에 써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룰을 정확히 숙지해 이슈를 잘 잡아낸다면 별다른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캘리포니아는 다른 주와 달리 통신로스쿨과 Non-ABA School이 많이 있다. 이들 학교는 정식 변호사시험을 보기 전에 baby-bar시험이라는 예비시험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낮은 합격률을 양산해 내고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결코 합격률로 시험의 난이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경력이 5년 이상인 한국변호사들이 응시할 수 있는 곳은 일리노이주 변호사시험이 있다. 김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영어실력은 빨리 읽고, 이해하는 독해능력이 조금 더 요구된다”며 “영어점수는 PBT기준 550점이나 IBT기준 80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면 충분히 바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현재 일리노이주 변호사시험 합격점수는 현재, 400점 만점에 264점이다. 2017년 7월부터 272점으로 상향조정되기 전에 도전해봄직하다는 분석이다.

가난한 집…빈곤을 탓하지 않았다

어릴 때 한 방에 4남매와 부모님이 함께 자고, 중학교부터는 집안사정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때도 있었다. 영등포 신길동. 김기태 변호사의 집은 항상 반지하방이었고, 여름이면 푸세식화장실에서 땀으로 샤워를 할 정도였다.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지만, 배수시설이 없고 구덩이에 분뇨가 쌓이는 방식이라 여름철 분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이 엄청났다고.

중학교 시절에는 처음 빈부격차를 느꼈다. 국내브랜드 운동화와 점퍼를 갖는 것이 소원이던 아이에게 외국 유명브랜드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는 친구들을 접하게 된 것.

그의 도시락 반찬은 김치 하나 정도였는데, 친구의 대여섯 가지 도시락 반찬을 보고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을 탓하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못 가진 것 때문에 가슴아파하기 보다 친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함께하려고 했다. 때로는 잘난 척 하는 아이들이 싫어 싸움을 많이 하기도 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본인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 어머님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막연히 훌륭한 사람이 꼭 되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육사를 가자니 몸에 난 상처도 많고,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운동으로 성적이 좋지 않아 차선책으로 법학과 지원을 목표로 삼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 13등으로 입학했지만, 어느 순간, 반에서 18등까지 성적이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반에서 10등 안에는 들어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부총학생회장을 맡으면서 고등학교 내내 수업 대신,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고3 마지막 10개월 동안 대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학교에서는 지원서조차 써 주려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 선생님을 설득한 끝에 중앙대 법학과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여서 국‧영‧수는 기본기가 있었고, 타 과목은 암기만 해도 됐기에 다행히 93학번으로 대학에 입성하게 됐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과대표를 맡고, 학생운동을 했다. 공부는 뒷전일 수밖에, 1학년 2학기 때는 모든 과목에서 'F'학점을 맞았다.

그러던 중 학생운동에 대해 한계를 느껴 사회운동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상식수준에서 열심히 더불어 살자는 것이 그의 기조였는데 발전적인 사회진출을 고민하고 있던 때 독서회 후배가 백혈병에 걸리자 이를 계기로 1994년 백혈병 돕기 콘서트를 연 것이 사회운동의 첫 시작이었다. 1995년 3학년 때는 진정으로 학생의 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단대 편집부를 편집위원회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펜을 잡을 수가 없다
강박증…꿈을 잃고 ‘방황’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아지자 그는 군대를 갔다. 1년은 현역으로 전방에서 병역의 의무를, 나머지 기간은 상근예비역으로 주민센터에서 근무했다. 악필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글씨연습을 시작했다. 펜글씨, 서예학원을 다니면서 한자공책 사각형 안을 연습한 글씨들로 빡빡하게 채워나갔다.

제대 후 신림동에서 오전에는 공부, 저녁에는 과외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헌법 강사에게 ‘글씨 못 써도 상관없고 빨리만 쓰면 돼’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펜만 잡으면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려 도저히 글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동안 글씨연습에 매진했던 나날들이 허사가 돼 버린양했다.

그의 깊고 긴 방황이 이어졌다. 집에는 공부를 하는 척, 외출을 하면서 실상 목욕탕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공부는커녕, 잠만 잤다. 글을 쓸 수 없게 됐으니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겠다는 꿈과도 멀어졌다. 꿈이 없으니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오로지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이러한 증상이 강박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1997년 다시 복학을 했다. 작은형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몸이 안 좋아져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학교를 휴학하고 2년간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이가 드니 괜찮은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선 한 달에 300만원의 수익은 있어야만 했다.

호프집 알바와 비슷하다는 말에 단란주점 웨이터를 처음으로 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복조리장사, 신문배달, 신문팔이, 호프집 서빙 등 안 해본 알바가 없을 정도였지만 이건 그런 차원과 달랐다.

서로 챙겨주고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단란주점의 아가씨들과 친분이 쌓여갔다. 새벽 3~4시 정도면 일이 끝
나는데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 아가씨들이 술에 만취하는 경우가 있어 웨이터들이 일일이 챙겨 줘야 했다고. 여전히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지만 좋은 글귀를 보면 자로 그려가면서 주고, 상담을 해 주기도 했다.
 
친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법대 학생이라는 자신의 신분도 노출이 됐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술집에 있는 건달들도 괜히 존댓말을 했고, 아가씨들도 2차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는 손님들이 팁을 주는 게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왠지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 어느 날 한 건설회사 손님을 따라 아가씨들이 단체로 2차를 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힘겨워 했다. 걸레를 빠는 것처럼 하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8~9개월 가량 웨이터 생활을 접고, 방향제 사업에 뛰어들어 2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2001년 우연히 배영호 미국변호사의 강의에서 미국변호사가 되는 법을 알게 되고 다시 그에게 꿈이 생겨났다.

단돈 340만원 가지고 미국행

미국변호사 시험은 수기가 아닌 랩탑 컴퓨터로도 볼 수 있다는 것에 그는 환호했다. 이상하게 사법고시를 포기한 순간부터 글씨가 조금씩 써 지기 시작했다. 김 변호사는 “지금 생각해 보면 강박증과 우울증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미국변호사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았지만 당장의 생활이 어려우니, 본격적인 준비라고 할 것 없이 식당 청소 아르바이트, 교내순찰 등의 일을 하면서 2002년 6월부터 토플만 준비했다. 알바 마치고 오면 자정 전인데, 밤새 토플공부를 했다.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그때는 다시 꿈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아났다.

당시에는 대학 추천 프로그램(URP) 비자신청제도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비자를 받아 미국행에 오를 수 있었다.

단돈 340만원을 가지고 간 미국행. 얼마 지나지 않아 수중에는 17불 밖에 남지 않았다. 한국에서처럼, 가릴 것 없이 일자리가 있는 곳에 뛰어 들었다. 운전강사. 택시기사, 주류상가 등에서 일했다.

캘리포니아 LA에서 택시기사를 하면서 3년 반이 지나갔다. 비자는 완료 기간이 다가오는데, 지원한 로스쿨에서 모두 떨어졌다. 그가 지원한 과정은 JD정규과정이었는데, 후에 우연히 LL.M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LL.M 과정이 있는지 조차 몰랐어요. 계속 어학연수만 다닌 것이나 다름없었죠. LA에서 무슨 영어 실력이 늘겠어요? 한국의 이태원 같은데!”

영어 스피킹 시험이 없는 지역으로 선회했다. 멕시코시티에서는 CBT 즉, COMPUTER BASE TEST, OMR 마킹대신 컴퓨터 앞에 않아서 마우스로 시험을 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나름 시험 족보가 형성돼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LL.M과정 5곳에 합격했고, 그중 인디아나 블루밍턴 LL.M과정을 선택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무려 11개월 동안 한 끼만 먹으면서 평일엔 8시간, 주말엔 16시간 일하며 버텼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맥도날드 햄버거 사먹는 돈조차 아까워 드럼통에 미역국을 한 솥 끓여 놓고, 밥 한 통 해 놓고 집에 와서 먹는 끼니가 전부였다. 그나마 달달한 커피믹스를 먹으면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고.

그는 “꿈이 있었기에 이 생활도 가능했다”며 “한국에서 글이 써 지질 않아 4년 동안 꿈을 잃어 본 시절이 있었기에 꿈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때보다 공부에 집중했다. 그의 일과는 도서관이 열리는 시간과 닫는 시간에 맞춰졌다. 그 성과로 졸업 때는 우등졸업상과 과목당 우수성적상을 수여받았다.

 

특히 우등졸업상은 단순히 성적이 좋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투표로 이뤄지는 상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한국인이지만 학생회 총무를 맡아 같은 처지의 외국인 학생들에게 자료를 나눠 주는 등의 선행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에서 All F의 성적에서 All A로 바뀌자,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부쩍 생겼다. 그런데 한국의 변호사시험과 같은 바 시험에는 3번 줄곧 미끄러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4번째에 합격할 수 있었다.

관련 책이 너무 없었던 탓도 있었다는 생각에 자신처럼 미국변호사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 영어본의 책을 잘 정리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꼬박 3년 반의 시간이 소요됐던 것이 바로 지금의 ‘김기태 미국변호사의 미국변호사 누구나 되기 시리즈’로 거듭날 수 있었다.

김 변호사는 “한국의 민법총칙 1/3의 분량도 안 된다”며 “한국어 본을 먼저 보고 영어 본을 보면 이해가 쉽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저와 같이 꿈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미국변호사가 된 김기태 미국변호사. ‘우여곡절’이라는 말이 이만큼 적절하게 표현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더 많은 정보와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미국변호사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오는 5월부터 법률저널 칼럼을 통해 매 시간 수험생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그가 미국변호사로 거듭나기 위해 걸었던 길이 역경의 비포장도로라면, 이 시대에 미국변호사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고속도로’를 펼쳐주고 싶어 했다. 그의 경험을 발판삼아 만든 노하우와 책, 각종 정보들로 자신과는 달리 보다 수월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이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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