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길잡이’ 김영기 공보판사, 친근한 법원 만들기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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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길잡이’ 김영기 공보판사, 친근한 법원 만들기 앞장
  • 이아름 기자
  • 승인 2014.02.1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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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민사소송을 시민들이 알기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있다. 춘천지방법원 판사들이 직접 참여, 제작해 화제를 모았던 영상물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얼마 전에는 시민들의 실생활과 가장 밀접하고 궁금해 하는 임대차 계약을 주제로 영상을 만들어 ‘5천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시민과의 소통 길잡이’로 나선 춘천지방법원 김영기 공보판사의 파란만장한 ‘친근한 법원 만들기’를 들여다봤다.
 

 

시민에게 다가가는 법원

주부, 택시기사, 이장, 대학생, 교수 등 춘천지역의 다양한 직업과 연령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법원을 향해 ‘쓴 소리’를 하고 나섰다. 이들은 지난 2011년 창립한 춘천지방법원 시민사법모니터 요원들로, 창립 당시에는 민원 창구에서의 문제점 지적 위주였으나 2012년, 2013년에는 법정에서의 언행, 재판 진행 상의 문제로까지 폭넓은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수행한 시민사법 모니터링 결과에 대해서 법원장, 수석부장판사, 기획법관과 함께 의견을 교환하고, 이 의견을 적극 일선에 투영해 시민과 가까운 법원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실제로 모니터링에서 제기된 법원 주차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법원 내 테니스장 일부를 주차장으로 변경하도 했다. 또 신속한 판결문의 송달, 법정언행, 소송담당자에 대한 배려 등에 대해서도 개선을 이뤘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앞에서 끌어 당겨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이가 춘천지법 기획, 공보판사 김영기 판사이다. 많은 시민들은 여전히 법률이라고 하면 어려운 전문 용어와 복잡한 절차, 게다가 수많은 관련 서류가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법원의 문턱을 높게만 느낀다.

알기 쉬운 법률 동영상 제작

모니터링에 그치지 않고 시민들이 법원에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인 의견을 모을 필요성이 대두됐다. 김영기 판사는 직접 시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가장 궁금하고 어려워하는 주제’를 취합해 나갔다. 어려운 법률정보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과 그림이 합쳐진 만화의 형태가 가장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전문가의 머릿속에 있는 어려운 내용을 만화가의 손으로 쉽게 풀어내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기초 작업인 원고 작성, 수정, 또 수정, 만화로 만들면서 내용 확인 작업 등 판사들의 노고가 그대로 녹아 있는 제작물이 탄생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지난해 그렇게 탄생한 것이 각종 민사 소송에 관한 애니메이션이었다. 곧 이어 법률정보 애니메이션 2탄으로 임대차와 관련된 정보를 제작해, 춘천지법 홈페이지 및 블로그, 유튜브 등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관내 시민뿐 아니라 전 국민이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했다.

 
공보관이자 기획법관인 김영기 판사는 시민과의 소통을 위해 모의재판, 배심원제 도입 등 법원이 먼저 문을 열고 재판 과정과 결과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프로그램을 기획 실천한다.

김 판사는 “‘요즘에는 법원이 알아서 재판 잘 하겠지’라는 믿음이 사라졌다”며 우려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래서 실제로 재판 결과가 나오기까지 법관이 어떻게 고민하고, 재판절차에 대한 궁금증을 시민들에게 적극 개방하기로 했다. 김 판사는 이 자체가 ‘소통’이라고 칭했다. 모의재판이나 배심원제 도입 등은 법원이 ‘소통’하고자 하는 활동 중 하나로, 법률지식을 알기 쉽게 알려 보자는 취지이다. 법원 입장에서도 소송이 너무 많아 업무 경감도가 큰 만큼, 분쟁을 줄여 나가고자 하는 취지도 있다. 시민들은 사전에 법률적인 정보를 알고 대응한다면, 법적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법원에 오는 많은 분들께 법원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씀 드려요. 법원하면 오고 싶지 않고 왠지 주눅이 들고 그런 인식이 아직 많거든요.”

김 판사는 많은 시민들이 직접 법원을 봤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바람을 드러냈다. 결코 극단적으로 하거나, 순간적인 경솔한 마음으로 재판을 하지 않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고뇌’에 찬 ‘결론’을 낸다는 것을 알기 바랐다. 그는 덧붙여 “법원을 믿어 주기 바란다”며 “이런 노력들이 한 두 해 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기에 믿을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국민참여 모의재판’ 열린 법원 피부로 와 닿아

지난해 12월 춘천지원에서는 시민사법참여단 ‘국민참여 모의재판’이 열렸다. 이는 법정에서 시민과 소통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시민사법참여단 27명이 직접 재판장과 피고인, 검사, 변호인, 배심원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이종격투기 선수 경기중 사망 사고’라는 가상 사건에 대한 ‘국민참여 모의재판’을 진행했다. 이날 모의재판은 결론이 제시되지 않은 채, 경기 직전 다량의 약물이 투입된 이종격투기 선수 A씨의 사망 사고가 ‘단순 사고냐, 보험금을 노린 아내와 내연남의 고의 살인이냐’를 판단하는 가상의 상황으로 꾸며졌는데 재판에 참여한 시민사법참여단들은 약 두 시간 동안 마치 실제 재판을 하는 듯 진지한 태도로 열띤 공방을 벌였다.

 

이날 모의재판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 같이 한 건 한 건의 판결이 엄격한 형사절차와 판사들의 깊은 고뇌로 이뤄진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김 판사는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법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걱정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판사들은 그렇지 않은데 오해를 받거나 부당하게 평가를 받는 것 같을 때는 속상한 마음이 든다고. 김 판사는 공보관으로서 법원이 든든한 곳이란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업무를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기획법관 업무 ‘절반’ 차지

공보 15~20%, 나머지는 재판업무

김영기 판사는 공보판사로서의 업무뿐 아니라 기획법관으로도 임하면서 시민과의 소통에 관련된 기획을 많이 한다. 앞서 말한 알기 쉬운 법률 동영상 제작이 대표적이다. 시민이 필요로 하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연구해서 실질적으로 알리는 모든 단계에 개입했다. 또 로스쿨 도입이후 지역 대학인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을 연중 실무수습을 하도록 배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외진 마을과 업무협약을 체결해서 법률적인 교육은 물론, 지역의 특산물 판매까지 연계해서 판로 개척을 돕고 있다.

김 판사는 자신의 업무를 기획과 공보관이 복합된 역할이라고 정의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단순히 모의재판을 보고 가버려 서로 피드백이 제대로 안 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요즘에는 재판을 보기 전 학생들이 시나리오도 직접 써 보게 하고, 재판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곁들여 주기 때문에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 요즘에는 TV드라마나, 영화 등에 법원과 관련된 내용들이 삽입되면서, 방송 및 영화 관계자에게 직접 법원 관련 업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도 진행한다. 법원과 관련된, 즉 우리생활과 밀접한 법률과 관련된 행사를 기획, 실생활에 녹여내는 것이다.

“제 고향이 전라남도 장흥이에요. 지역을 다니다 보면, 고향의 어르신들이 많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할머니 한 명이 재판하러 오는 모습을 보고 짠한 마음이 들어, 법원에 어떻게 왔는지 어려운 법률용어 대신에 말로 풀어 설명하기도 했다고. 태생이 시골이고 시골에서 법률용어의 어려움을 느끼는 이웃과 부모님을 보면서 자랐기에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다.

공보판사이자 기획법관인 김 판사는 일반 재판 업무까지 크게 3가지 역할을 하다 보니,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편이다.

“기획법관 업무 비율이 절반이상이고, 공보판사 업무가 15~20%, 재판 업무는 그보다 적어요”

그는 세 가지 역할을 하면서 그 중 가장 보람된 일은 역시 ‘법관으로서 재판을 하는 것’이라고 꼽으면서도, 공보와 기획법관 일을 같이 하다 보니 재판의 영역을 벗어나 또 다른 의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9개월 동안 매달려 만들어낸 임대차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니 좋았어요. 재판을 통해 사회에 기여도 하지만 이런 통로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판사는 재판 결과를 말하는 것이 금기시 되던 시대도 있었고, 요즘엔 불필요하게 법원이 불신을 받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어 공보관으로선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사회의 주목이 큰 소송의 경우, 미리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판결에 들인 수고가 폄하되지 않도록 일조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한 번에 모든 일이 불시에 주어질 때 느끼는 업무의 중압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재판에 대한 고민 깊이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업무를 동시에 맡으면서 고도의 멀티테스킹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법원의 행사 기획, 판결 기록 보도, 언론사 답변, 본원 아래 4개 지원에 대한 현황을 취합해 법원 행정처에 보고서를 작성해 보내기도 해야 한다.

‘판사’ 책임감 강한 직역

판사들은 ‘제너럴리스트’로서 트레이닝을 받는다. 민․형사 등 가리지 않고 모든 재판을 잘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감이 강해진다.

“공무원 3급 이상의 대우를 받지만 휴일, 야근 수당이 없는데도 여러 판사님들이 야근과 주말업무를 가리지 않아요. 판사라는 직분이 주어진 만큼, 재판에 대한 책임감이 더 강해지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해내는 것 같아요.”

공보판사는 법원을 대신해 언론에 법원의 일을 알려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구체적으로 사회적인 의미가 있는 판결에 대한 판결 경위, 의미 등을 통일된 창구로 나갈 수 있도록 한다. 보통 공보판사는 해당 법원의 법원장이 지명으로 맡게 되는데,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정도 역임한다.

김영기 판사는 올해로 춘천지원에서 3년째를 맞이한다. 2년까지 민사재판을 하다가 공보관의 업무가 주어졌다. 이는 지역 실정을 파악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져야 공보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 공보관은 법원장의 의지를 각 판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맡기에 판사들과의 관계 설정이 필요, 판사들과의 친밀도도 형성돼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연수원 수료 후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 수원지방법원 2년, 춘천지방법원 3년을 지냈으니 7년 꼬박 재판만 하다가 8년차에 재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업무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공보관 초창기에는 언론의 요청이나 질의에 즉각적인 답변을 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답변의 ‘수위’를 결정하고, 어느 정도까지 ‘정제’되도록 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고, 공보관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워크샵을 통해 교육도 받는다.

많은 업무를 맡아 하면서 재판에 참여하는 횟수는 반대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재판이 다른 법관에게 돌아가 가는 꼴이 돼 버려 미안한 마음과 함께 법관이 증원됐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때론, 그가 하는 업무 자체의 결과물이 곧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의 가치를 몰라주는 동료를 대할 때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고 말했다.

‘칼 대 칼’ 대신 ‘조정’

요즘 민사소송에서는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지 않고 양보하기 싫어하는 세태라고 꼬집었다. 층간소음과 경계분쟁 등이 대표적이다. 위층 아이들로 인해 조용히 지낼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것을 참지 못해 법률분쟁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또한 수 십 년, 수 백 년 한 지역의 길로 이용되던 곳도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철거소송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김 판사는 조정을 유도한다. 일도양단의 판단보다는 화해를 통해서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시간으로 보상하는 방법으로 협의를 이끈다.

춘천지법은 많은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민참여 민사재판을 기획했다. 2012년 김 판사가 민사재판장으로 있을 때 도입한 것으로, 민사재판 전 과정에 배심원제도를 도입해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했다. 시민들이 직접 조정위원이 돼 도록해 조정안을 내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태풍 등으로 농산물 피해가 있을 때 보상해 주는 재해보험이 있는데요. 피해를 농민이 직접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나 봐요. 낙과의 개수를 세고, 피해 복구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서 낙과가 증거라고 마냥 놔둘 수만은 없는 일이잖아요.”

증거가 없으면 보상이 안 된다며 ‘칼대 칼’로 판단하지 않고, 농민의 사정을 잘 아는 시민들을 배심원으로 불러 조정을 많이 이뤄냈다.

물론, 이런 방법이 시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지만, 재판을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법리연구, 판례, 학설 등을 찾아보고, 시민들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다 보면, 확실히 시간이나 인력의 소요가 클 수밖에 없다. 일이 늘어나게 됐다. 하지만 재판참여를 해 본 결과, 시민들이 법률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는 반응을 보여 올 때면 법원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고.

“오늘 든 품이 힘이 들고 어려웠지만 그 가치가 있다. 법원 신뢰도를 쌓아 가는데 벽돌을 하나 더 쌓았구나.”

보증의 덫 풍비박산…법조인 꿈 키워

“법 몰라서 눈물 흘리는 사람 없도록”


김 판사는 전라남도 장흥군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법률소송도 적고, 법 없이도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 대다수이겠지만, 작은 법률지식의 부재가 보통 가정에는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겪게 됐다.

작은아버지가 돈을 빌리는 자리에 그의 아버지가 참석해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찍었던 ‘도장’이 화근으로 돌아왔다. 분명, 보증의 의사 없이 단지 입회했던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도장’의 의미는 연대보증채무를 짊어지라는 취지의 소송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법을 잘 몰라 빚어진 일이었지만,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 연출됐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 때 물어 볼 사람이 없으니까 몇 다리 건너서 법원 경비로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을 정도였어요.”

그러한 소송의 덫은 어느 날 갑자기 가세를 급격히 기울게 만들었고 단란했던 한 가정이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시골에는 법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그와 그의 가족도 여기에 포함됐다.

“법조인이 돼서 법을 몰라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겠다고 마음먹었죠.”

법조인이 되겠다는 의지는 개인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김 판사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큰형의 권유도 있었고, 서울대 법대를 목표로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전학을 떠나기 전 선생님 두 분께서는 상반된 말을 그에게 전했다. 한 선생님은 ‘매번 1등을 했으니 서울에 가서도 잘 할 수 있을꺼야’라며 응원을 해 준 반면, 다른 선생님은 ‘넌 서울 가면 꼴등이야’라고 경고했다. 서울로 전학 후 곧 치른 시험에서 난생처음 13등을 했던 것이다. 그때 그 선생님의 경고가 떠올랐다. 서울 아이들에게 지기도 싫거니와 격려해 준 선생님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를 치면, 2지망은 쓰지도 않았던 그였다. 오로지 서울대 법대만을 고집했지만 결국, 재수로 고려대 법대를 진학했다. 그래서 사법고시는 더욱 빨리 합격해야 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동안 지쳐있었던 탓에 당장은 대학생활을 즐기기로 했다.

김 판사는 대학 풍물패에 들어가 정말 실컷 놀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던 중 그의 고등학교 선배들이 고시공부를 시작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군대를 빨리 갔다오라고 충고했다.

마침 IMF라서 1학년 기말고사 치르고 1997년 12월 29일 입대를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자대배치를 받는데 하필이면 강원도 양구군 최전방으로 떨어졌다. 90미리 무반동총을 메고 다니면서 육체적으로 엄청 고된 시절이 펼쳐졌다.

“잠은 쏟아지고 살을 에는 듯한 혹독한 추위와 맞서야 했어요. 혹한기 훈련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게 얼마나 행복한지 진정으로 깨닫게 됐죠.”

사병으로 갔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화장실에서 몰래 불어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날 휴가 복귀 전 그의 어머니는 아침밥상을 내주며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말을 전했다. 곧 그 말은 유언이 되고 말았다. 일주일 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던 것이다.

혹독했던 군 생활에 이어 어머니마저 갑작스럽게 여의고 나서 그의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공부하는 것 자체를 행복으로 느꼈다. 2000년 2월 제대하고 3일 후 복학을 했다. 이제부터는 쉴 겨를이 없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1순환만 하고, 학교 고시반에서 고시 공부를 이어갔다. 3학년 때 1차 시험에 합격하고 1년 휴학을 했지만 동차는 실패했다. 좌절하지 않고 4학년 때 2차에 합격해 2004년에 연수원에 입소했다.

“공부할 수 있는 것이 행복했어요. 그런 경험들이 자신의 마음을 강하게 한 계기됐어요.”

‘사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다. 시험을 치는 순간 밑 빠진 독에 80%이상 물이 차 있어야 합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느 순간 80이 될지 알 수 없어 힘들었지만 풍족한 환경 보다 부족한 환경이 그를 더 채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 판사는 두 형이 학원비를 모아서 주는 등 가족의 격려가 있었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수험계획을 보다 빠듯하게 구성했다. 공부 일지를 쓰며 하루하루를 체크해 나갔다. 토요일 오전에는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등산을 하면서 체력관리와 휴식, 정신수양을 했다. 산에 오를 때면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확정되지 않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김 판사는 “열심히 도전해 보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매진해 본 경험이나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며 “그것이 좋은 결과로 맺어지면 좋겠지만 처음 뜻했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극한까지 쏟아서 도전했다면 다른 도전 할 때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목표를 세워 열심히 한다면 어떻게든 값지게 쓰인다는 의미다.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수험생들에게 주문했다.

이아름 기자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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