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에서 변호사로, 정치인으로, 다시 변호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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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에서 변호사로, 정치인으로, 다시 변호사로
  • 이아름 기자
  • 승인 2013.12.0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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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희 프로필
변호사 / 18대 국회의원/ 치과의사 /
아시안게임 저탄소친환경위원장

얼마 전까지 국회에서 정책입안자로 활동하던 국회의원이었다. 그 전엔 치과의사로 또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 1호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되고자 한다고 누구나 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너무나도 다른 지역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사회의 그릇된 모습을 개선하고 또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를 제시하며 여러 시사점을 남겼다. 앞으로 그녀의 행보에 주목이 가는 이유는 당연하지 않을까!

 

 

 

치과의사 워킹맘의 변호사 거듭나기
 

1990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봉직의로 활동하던 전현희 변호사에게 도저히 포기 할 수 없는 꿈이 되살아났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던 변호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후회가 남는 삶이 될 것 같았다. 사법시험에 도전한다는 그녀의 말에 주변 모든 이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당시 전 변호사 같은 선례가 없는데다 어렵사리 공부해 치과의사가 됐는데 굳이 기약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 이해받기 어려웠을 터이다. 많은 고민과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겠다며 고생길을 선택했다.

워킹맘의 사법시험 도전은 어려움의 연속이다.
반지하 전세에서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아이와도 떨어져 수험생활을 이어갔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이 양육이 어려워져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엄마의 마음은 매한가지, 아이와 떨어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들다. 그리고 한 가정이 원만하게 돌아가자면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힘들다 보니 집은 반지하 전세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남편이 그녀의 지원군을 자처했다. 당시 같은 대학 법대 출신인 남편도 사법시험을 준비 중이었는데 비법학사인 그녀에게 개인과외를 방불케 할 정도로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지금은 어려운 공부를 거쳐 변호사가 됐지만 처음 마주한 법률공부는 이과출신인 그녀에게 너무도 막막하게 다가왔다. 민법총책을 1회독 하는데 무려 1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어려운 법률용어를 극복하는 것도 난관이었고, 한자가 큰 곤욕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법률용어와 한자가 익숙해지자 그 때부터는 공부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래도 민사소송법은 가장 어려운 과목이자, 그녀를 괴롭히는 과목이었다. 판례도 많고 공부해야 할 범위가 광범위한데다 법률지식이 짧고 기보적인 개념이 부족하다 보니, 응용까지 하는 것이 어렵게 다가왔다. 그래도 명쾌하게 결론이 나는 형사법은 상대적으로 편했다.

어렵게 시작한 공부, 꿋꿋이 책상을 지켜

치의학을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평생 이만큼 집중해서 공부했던 시기가 있을까! 전 변호사는 이같이 수험생활을 기억했다. 30대 초반부터 시작해 36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다. 아무래도 공부만 할 수 없었던 여건이다 보니 실제로 본격적인 수험생활은 2년 반 정도가 걸렸다.

혈우병환자 에이즈 집단감염 무료소송 이끌어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 1호이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료소송이 많아졌다. 전 변호사는 진료기록을 파악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법적인 문제로 연결하는데 치과의사로서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아산병원 조영걸 교수가 전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다.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논문을 쓰던 중 거대 제약회사로부터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것이다. 혈우병 환자에 대한 서베이 중 환자들이 집단으로 에이즈에 걸린 것을 발견, 발병원인을 혈우병 치료 혈액제로 지목했던 것이 이유였다. 사건을 접하게 된 전 변호사는 먼저 에이즈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의 상태가 걱정됐다. 1990년대 정도 감염 당시 환자들의 나이는 기껏 4~5살이었고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2000년대 초에는 아이들이 청소년이 된 시기였다.

혈우병 약제로 에이즈 집단 감연 된
혈우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절망...
그들의 고통과 안타까움
함께 고민하기 위해 무료소송 시작

혈우병 하나도 견디기 힘들 텐데 에이즈까지,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 변호사는 이들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무료소송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소송은 쉽지 않았다. 피해자 이지만 세상의 편견이 두려워 숨어 있던 피해자들과 직접 대면은 물론, 자료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피해자들과 만나 설득, 또 설득, 비밀을 지킬 것을 보장하며 소송준비에 들어갔다. 1년의 시간이 걸려 관련 자료를 모으고 해석, 2003년에야 소장을 접수할 수 있었다.

감염경로
국산이냐 외국산 치료제냐
인과관계 밝히는 것이 관건!

당시 비슷한 유형의 혈우병환자들의 치료제에 의한 에이즈 집단감염이 일본을 비롯한 미국, 캐나다 등 세계각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관건은 국내 피해자들이 국산이냐 외국산 치료제를 사용했냐는 것이다. 감염환자군들의 에이즈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오염원 감영자들의 유전자와 각 상동성이 매우 일치한다는 점, 모두 혈우병치료제로 녹십자사의 훽나인을 공통으로 투약 받았다는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제약회사에서는 인관관계가 없다며 과실을 완전히 부정하고 나왔다. 2005년 제1심법원에서 녹십자의 혈액제제 훽나인과 환자들의 에이즈감염과의 인과관계 인정 및 일부 원고들에 대한 소멸시효완성을 판시하는 원고일부승소판결이 났다. 그러나 2008년 제2심 법원에서 원고들 전부 패소 판결이 났다. 다시 시간이 흘러 2011년 9월 대법원 판결이 났다. 피고회사의 과실과 이사건 훽나인과 원고들의 에이즈감염원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했으나, 일부 원고들에 대해 심리미진을 이유로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됐다.

진상규명 좌절...그럼 내가 법 바꾸겠다!

이 사건은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이 필요했다. 그 결과에 따라 혈액제제 및 혈액오염의 문제점도 개선돼야 했다. 그래서 시중 1위 시위도 마다하지 않았고, 방대한 자료와 의견서를 준비해 국회보건 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관심을 촉구했지만 번번이 좌절당했다. 갓 연수원을 졸업한 여변호사의 목소리는 사회에 큰 울림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안타까움과 고민이 깊어가던 무렵, 전 변호사는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서 비례대표를 검색했다. 신청서 제출 후 거짓말처럼, TV에 2008년 제 18대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후보로 자신의 출마가 방영되는 것을 목격했다.

 

 

“비례대표는 엄청난 백이 있거나 미리 내락을 하고 인맥을 통해 나온다는 둥 그런 소문이 많아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일체 그런 것 없이 신청서 달랑 하나 냈는데 뽑아 주니 깜짝 놀랄 수 밖예요.”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전 변호사는 달라졌다. 이 시기는 변호사로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던 때였다. 국내최초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라는 유명도에 다가 여성으로서 로펌 대표 변호사까지 지내다 보니 어딜 가든지 대접받고 주목받는 주인공의 자리에 서 있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상, 모든 국민이 자신 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국민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더욱 겸손해졌다. 공직자로서 양보하고 공손하며 예의바른 자세가 몸과 마음에 배도록 노력했다.

국회의원 전현희, 국내 혈액관리 법령•정책 재정비 나서

국회의원 활동 중 그렇게 염원하던 혈액관리 관련 법령과 정책들을 국민보건의 입장에서 재정비를 이뤄냈다. 그날은 전현희 국회의원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한때는 변호사로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녹십자와 마주 앉아 개선사항을 요구했는데 이제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으로서 혈액관리에 대한 국가적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고 혈액관리의 전 과정에 대한 엄격한 관리시스템 구축을 촉구하게 된 것이다. 소송기간만 8년이 걸렸고, 환자와 가족들과 함께 10년이 넘는 시간을 에이즈의 공포와 사회적 무관심에 함께 울고 고통스러워했다. 이 사건의 무료 변론을 맡으면서 약자보호를 위한 사회 참여라는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된 사건이기도 했다.

 

사진설명: 2011년 대한 녹십자사 국정감사

당시 국회의원으로서 전현희 변호사는 국민의 보건복지와 관련해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도록 열정을 쏟았다. 국민건강복지포럼이라는 국회 연구단체 활동에서는 해마다 국회의장 1등상을 수상했다. 임기 4년 동안 총 4번의 1등상 수상은 그야말로 그 누구보다 성실히 의정활동에 임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와 함께 금연정책, 장기기증 운동, 헌혈, 건강보험보장성 확대 등 입법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국민들이 생활에 와 닿는 정책을 실현 했다.

“지지자들 중엔 금연정책을 보고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장기기증 캠페인을 펼치는데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동참한 사연을 접하다 보면 참 보람을 느껴요.”

전 변호사는 자신과 같이 법조인들이 입법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법조계에서 정치인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한쪽은 법을 만들고 다른 한쪽은 법을 적용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깝게 느껴서 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향상시키는 목적으로 정치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좀 더 크게 쓰임새가 있고 좀 더 공익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곳에 능력을 쓰고 싶은 이들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치가 목적이 아닌, 그런 공익적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향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앞으로 10년은 ‘탄소감축’에 올인!

어떤 일에 매달리면 끝을 보는 성격인 전현희 변호사. 의료, 법조, 정치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이제는 지구환경을 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아시안게임 저탄소친환경위원회 위원장으로 국민 앞에 나서고 있다.

“첫 아이 출산 후 아이 한명 키우는데 소요되는 종이 귀저기 때문에 작은 섬 하나 분의 나무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후부터 엄마로서 우리 아이가 앞으로 자라날 환경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일들을 실천해 나갔어요.”

그녀가 엄격한 환경 보호가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평범하게 일상생활에서 작은 부분 하나에서부터 환경을 파괴하는 일을 막고, 보호하고자 실천해 왔다. 아시안게임 저탄소친환경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기 전에도 이미 전 변호사의 마음에는 환경보호의 마음이 일렁였다. 아이를 출산한 후 천 귀저기 사용이 그 첫걸음이었다. 물론 워킹맘으로서 저녁 늦게 귀가해 천 귀저기를 세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환경 훼손을 막았다는 생각에 힘을 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외동딸이지만,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유모차를 수리해 사용했다. 아이 용품이나 옷 등도 주변에서 물려받고 벼룩시장을 이용했다.

“버려지는 물건이라고 하면 쓰레기로 인식하는데, 실제는 꽤 쓸 만한 것들이 버려지고 있어요. 진정한 사랑의 의미로, 아이에게 어떤 것이 잘 해주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정답은 환경을 지키는 것이죠.”

여름철 집에서는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약간의 불편을 감소하면 실생활에서 지구환경을 지킬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런 정도의 아끼고 재활용하는 실천들이 모이면 우리 선조들이, 현대의 우리들이 아낌없이 써 버리고, 훼손해 버린 환경을 가꾸고 지켜, 우리 아이들과 후손에게 살 만한 환경을 남겨 줄 수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아름 기자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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